진단학회 창설 한국사학 개척|「한국사」전7권 완성 역사학에 큰획|만년엔 「유학사」집필… 노익장 과시|두계 이병도박사의 업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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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일제가 말기적증상을 나타내던 1934년 두계 이병도박사는 학술적인 대일항쟁수단으로 역사학·국문학·언어학·고고학 전공의 당대 석학24뎡과 함께 진단학회를창설, 대표를 맡으며 한국사학을 개척했다.
「진단」은 대동방의 뜻이었다. 학회본부는 서울계동 이박사 사랑방이었고 조윤제·최현배씨 등이 함께 일했다.
김성수·윤치호씨등한테 찬조금을 받았다. 진단학회는 일제에 대한 학문적 저항이었다. 한국학을 통해 우리 의 주체성을 찾아내려는 지식인의 모임이었던 진단학회의 활동은 자연히 일제의 탄압을 불러왔고 재정난까지 겹쳐 44년 진단학보를 자진폐간했다.
해방후 두계는 진단학회를 재건하고 서울대사학과를 이끌어갔다. 해방당시 이미 50세였던 이박사는 그 자신이 창설멤버였던 진단학회릍 중심으로 불모에 가깝던 국학진흥을 위해 『진단학회한국사』전 7권을 완성하는 등 연구기반을 다지는데 힘을 기울였다.
학문연구와 함께 후진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은구·한치근·김원룡·고병익·이기백·이광린·윤무병등이 이박사의 뒤를 이어 국사학계를 다져갔다.
이박사는 「이율곡의 입산동기에 대하여」이래 80여편의 논문을 썼고 「한국사대관」등 30여권의 저서를 냈다. 「한국사고대편」 「한국사중세편」 「고려시대연구」 「한국고대사회와 그 문화」등이 그의 주요업적이다.
그의 학문적열정은 만년에도 식지않아 「한국유학사」국문판 집필에 마지막 힘을 바쳤다.
그의 학문적 자세는 철저히 실증적이었다. 비록 근년에 들어 그의 실증사학이 식민지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역사학의 보편적·기본적 방법론으로 인식되고 있는 실증론을 학계에 심었고 일제시대 국학의 명맥을 이었으며 그것을 해방이후로 이어준 그의 학문적 공로는 크다.

<이병도박사 약력>
▲1896년 경기도용인생▲1915년 보성전문졸▲19년 와세다대졸·중앙교교원▲32년 중앙불전강사▲34년 진단학회창설(대표)▲45년 서울대문리대교수▲54년 학술원종신회원·서울대대 학원장▲60년 문교장관▲66년 대동문화연구원장▲68년 3·1 문화추진위이사▲82년 민족문화추진회이사장▲84년 다산선생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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