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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기억하는 감각을 깨우자, '북클럽' 그녀처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17)

오랫동안 놓고 있었던 골프채를 다시 손에 쥐었다. 아이를 좀 키워놓고 9년 만에 시작한 거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성적이 나왔다. 골프도 자전거처럼 한번 배워놓으면 몸이 기억하는 걸까. 몸속에 남아있는 기억만 잘 끄집어낸다면 앞으로도 즐겁게 삶을 맛볼 수 있겠다 싶다. [사진 unsplash]

오랫동안 놓고 있었던 골프채를 다시 손에 쥐었다. 아이를 좀 키워놓고 9년 만에 시작한 거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성적이 나왔다. 골프도 자전거처럼 한번 배워놓으면 몸이 기억하는 걸까. 몸속에 남아있는 기억만 잘 끄집어낸다면 앞으로도 즐겁게 삶을 맛볼 수 있겠다 싶다. [사진 unsplash]

생각했던 것보다 잘 맞았다. “그래도 이전에 배우셨던 게 있어서 금방 자세가 나오네요.” 티칭해 주던 프로가 진도를 빨리 나갈 수 있겠다고 말한다. 9년 만에 7번 아이언을 꺼냈는데, 그립을 잡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마흔 즈음이었나. 당시 다니던 회사 내 피트니스 센터에 골프 클래스가 있었고, 골프를 치는 게 업무 확장에 도움이 된다는 주변의 권유도 있어 연습을 시작했다. 7번 아이언부터 드라이버와 퍼터까지 시간 나는 대로 트레이닝을 받았고, 몇 개월 뒤 고대했던 머리도 올렸다. 그 후로도 몇 번 지인들과 필드에 나갔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골프채를 놓았는데, 도저히 연습할 시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려서 엄마 손이 필요한 데다 일도 바빠진 상황에서 골프를 친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연습이 부족한데 필드에 나가는 건 함께 간 이들에게 민폐였기에, 여유가 생길 때 제대로 연습하며 치기로 하고 골프백을 닫았다.

다시 골프를 치기로 마음먹은 건 얼마 전 이사한 아파트 단지 안에 골프 연습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다. 입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조용하고 비용 부담 없는 연습장을 확인한 순간, 다시 한번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올 때까지 저녁 시간에 여유도 생긴 상황이니 가능할 것 같았다.

영화 '북클럽'에 등장하는 네 여주인공들은 수십 년 동안 함께 책을 읽는 모임을 가졌다. 그런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일명 '엄마들의 포르노'라고 불리는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였다. [출처 영화사 진진]

영화 '북클럽'에 등장하는 네 여주인공들은 수십 년 동안 함께 책을 읽는 모임을 가졌다. 그런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일명 '엄마들의 포르노'라고 불리는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였다. [출처 영화사 진진]

그리고 레슨 첫날.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라 생각하시면 돼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라며 자세를 잡았는데, 내가 봐도 나쁘지 않은 타격이 나왔다. 자전거처럼 골프도 한번 몸에 익으면 자연스레 기억해 내는 걸까. 어찌 됐든 시작이 좋았다. 몸의 기억에 감탄하다 보니 며칠 전 보았던 영화 〈북클럽〉이 떠올랐다. 60대 후반의 여자 친구들이 사랑에 대한 호기심을 다시 찾고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린 영화다.

제인 폰다(1937년생), 다이안 키튼(1946년생), 캔디스 버겐(1946년생), 메리 스틴버겐(1953년생) 등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주연상을 휩쓸었던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40년 지기 친구로 출연한다는 소식만으로도 극장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굳이 배우들의 실제 출생연도를 적은 것은 그 나이의 여성들이 전하는 매력에 함께 빠져보자는 의미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친구인 이 네 여성은 40여 년 동안 매달 책 한 권을 함께 읽으며 일상을 나누는 ‘북클럽’을 진행했다.

그들 앞에 놓인 이달의 책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우리 나이에 이런 책을!’이라며 손사래를 치던 그들이었지만 막상 책을 읽다 보니 잊고 있던 사랑의 감각(감정)을 기억하게 된다. 언젠가 경험했던 몸과 마음의 기억, 그러나 이제는 더는 우리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문을 닫았던 그것 말이다.

‘이 나이에 섹스가 필요하다면 신은 우리 몸을 이렇게 늙게 하진 않았어’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던 섀론(캔디스 버겐)이 데이트 사이트를 통해 흔쾌히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데까지 마음을 열었으니 책 한 권이 전한 힘이 강하기는 하다. 물론 그들을 변화하게 한 것이 단순히 ‘그레이 씨의 사랑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다.

망측하다고 생각했던 책은 젊은 시절의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나이를 벗어나 네 여성들이 자신의 마음과 욕망, 호기심에 충실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사진 네이버 영화]

망측하다고 생각했던 책은 젊은 시절의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나이를 벗어나 네 여성들이 자신의 마음과 욕망, 호기심에 충실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사진 네이버 영화]

소설은 ‘나이’라는 무게로 눌러 놓았던 호기심과 떨림을 들여다볼 수 있게 했을 뿐이다. 그것이 지렛대가 되어 닫고 있던 욕망의 문을 열게 되었다고 할까(그립을 잡았더니 공을 칠 수 있는 감각을 찾아낸 것처럼 말이다). 책이 계기가 되었지만, 용기를 가지고 변화를 실행한 것은 그들 자신이다. 응원과 지지를 해 준 오래된 친구들의 힘 또한 작지 않다.

“난 더 탐험하고 싶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다. 아버지와 사별한 엄마를 도움이 필요한 노인으로만 여기며 걱정하는 딸들에게 다이앤(다이안 키튼)이 외친 말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호기심에는 한계가 없다’는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를 담아낸 이 말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은 걸까. 개봉 3주차 만에 여름 대작 영화들 사이에서 2만 명이 넘는 흥행을 발휘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경험하고, 사람과 상황에 영감 받는 순간은 젊은 시절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 순간을 이미 한 번쯤 경험했던 우리 아닌가. 몸속에 남아있는 기억만 잘 끄집어낸다면, 그것을 닫아 버리거나 무시하지 않고 잘 살려 낸다면, 기대 가득한 내일을 그릴 수 있다. 물론 그때만큼 빠르지는 않겠지만, 그 순간에 더 감사할 수 있기에 행복은 다르지 않을 거라 믿는다.

김현주 우먼센스 편집국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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