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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아와 아녜스, 이별을 전하는 두 장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16)

영화 <글로리아 벨>은 50대 여성의 사랑, 이혼, 퇴직, 노화, 자녀, 행복을 둘러싼 이야기를 진솔하게 내보인다. 글로리아는 삶에 치이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다. 춤을 출 용기 조자 없다. 그랬던 그가 춤을 다시 추기 시작한다. 행복을 찾아 떠나겠다는 신호다. [사진 네이버 영화]

영화 <글로리아 벨>은 50대 여성의 사랑, 이혼, 퇴직, 노화, 자녀, 행복을 둘러싼 이야기를 진솔하게 내보인다. 글로리아는 삶에 치이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다. 춤을 출 용기 조자 없다. 그랬던 그가 춤을 다시 추기 시작한다. 행복을 찾아 떠나겠다는 신호다. [사진 네이버 영화]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너 정말 기억 못 하니? 그가 뭐라고 했었는지?
( And you really don't remember, was it something that he said?)
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글로리아라고 부르고 있다고?
(Are the voices in your head calling, Gloria?)
글로리아, 네가 무너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아?
(Gloria, don't you think you're fallin'?)
만약 모든 사람이 너를 원한다면 왜 아무도 너한테 전화 안 하겠니?
(If everybody wants you, why isn't anybody callin'?)

영화 <글로리아 벨>의 마지막 장면. 1980년대 추억의 팝송인 로라 브래니건의 ‘Gloria’에 맞춰 주인공 글로리아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잘 들어보면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멜로디와 비트는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흥겹다.

‘줄리안 무어의 인생 연기’라는 추천사를 읽고 챙겨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영화다. 역시나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50대 여성이 사랑을 시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연기한다. 로맨스만 있는 건 아니다. 이혼, 퇴직, 노화, 자녀의 결혼과 임신 등 그 세대라면 경험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입소문이 난 것일까. 극장 안에는 중년의 여성 관객이 가득했다. 나 역시도 영화를 보는 내내 ‘저럴 수 있어’란 생각이 들었으니, 객석의 다른 여성들도 비슷했으리라. 영화는 이혼한 지 12년 된 글로리아와 이제 막 이혼한 아놀드가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때론 서운해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랑은 20대나 50대나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20대의 사랑과 50대의 사랑은 별반 다를 게 없다. 글로리아와 아놀드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고, 서로에게 서운함도 느낀다. 다만 20대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빨리 알고, 인정할 줄 아는 게 이 어른들의 사랑법이었다. [사진 네이버 영화]

20대의 사랑과 50대의 사랑은 별반 다를 게 없다. 글로리아와 아놀드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고, 서로에게 서운함도 느낀다. 다만 20대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빨리 알고, 인정할 줄 아는 게 이 어른들의 사랑법이었다. [사진 네이버 영화]

많은 일을 경험한 이후 맞이하는 사랑이니, 젊었을 때보다는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랄까. ‘밀당’하기보다는 빠르게 감정을 인정하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공유한다는 것이 중년의 사랑이 가진 미덕처럼 보였다. 물론 그것이 헤어지는 이유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영화 속 가족의 모습도 충분히 이해됐다. 전 세계를 여행하며 사는 스웨덴 서퍼를 사랑하게 된 딸에게 글로리아는 “내일 죽을지도 모를 사람이야.”라고 걱정스레 말하지만, 20대의 딸은 엄마의 걱정에 쿨하게 응수한다. “우리도 내일 죽을 수 있어.”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걱정할 수밖에 없다.

글로리아의 노모 역시 딸을 걱정한다. “인생은 화살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이렇게 휙~.” 이번에는 글로리아가 노모에게 무심하게 답한다. “알아. 엄마가 10년마다 하는 말이잖아.” 엄마일 때와 딸일 때의 입장은 이렇게 다르다.

딸을 스웨덴으로 떠나 보내며 공항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글로리아의 모습을 보며 몇 년 후 딸이 커서 내 품을 떠날 때를 그려보았다. 라스베이거스까지 단숨에 달려와 위기에 처한 글로리아를 살뜰하게 챙기는 노모를 보며 언제나 나를 걱정하시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현재의 나를 돌아보며 공감할 수 있는 영화가 <글로리아 벨>이었다면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앞으로의 나의 모습을 그리며 감탄한 영화다. 올해 초 91세의 나이로 타계한 프랑스의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마지막 작품으로, 본인이 감독하고 출연해 지난 65년간 자신이 작업한 영화와 창작 과정을 담백하게 전달한다.

아녜스 바르다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신념과 메시지를 던진 여성감독이다. 그는 영화에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담고자 해왔다. 2015년에 칸 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수많은 영화인의 롤모델이던 그는 지난 3월 타계했다. [EPA=연합뉴스]

아녜스 바르다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신념과 메시지를 던진 여성감독이다. 그는 영화에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담고자 해왔다. 2015년에 칸 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수많은 영화인의 롤모델이던 그는 지난 3월 타계했다. [EPA=연합뉴스]

1960년대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이끈 유일한 여성감독이다. 지금까지 50여편의 장·단편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그는 2015년 칸 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을 정도로 전 세계 영화인의 존경을 받아온 인물이다. 작은 키에 강직하지만, 유머 있는 얼굴의 아녜스 감독이 객석을 향해 놓인 의자에 앉아 관객에게 말을 건네며 영화는 시작한다. 조용하지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다. 진지하고 솔직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참 여러 영화를 만들었어요. 저한텐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영감, 창작, 공유죠. <영감>이란 ‘왜 영화를 만들까?’ <창작>이란 ‘어떻게 만들까?’ 세 번째는 <공유>입니다. 영화는 혼자 보는 게 아닌 보여주는 거니까요.

그리고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 <블랙 팬더>(1968)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1977) <낭트의 자코>(1991) 등 자신의 작품 몇 편의 제작과정을 소개한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권 운동과 페미니즘, 새로운 아트 신에 대한 도전 등 그의 예술 성향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90세가 넘은 감독이 눈을 반짝이며 지금까지 그려내고 싶었던 것, 지금도 그리고 싶은 것에 관해 이야기하다니.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아녜스 바르다가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 시도하는 대화로 막을 올린다. 영화에서 그는 영감, 창작, 자유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진 네이버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아녜스 바르다가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 시도하는 대화로 막을 올린다. 영화에서 그는 영감, 창작, 자유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진 네이버 영화]

“오늘 수다는 이렇게 마쳐야 할 것 같네요. 흐릿하게 사라질게요. 전 떠납니다.” 바닷가를 걸으며 전한 그의 마지막 인사! 세상과의 이별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니. 끊임없는 열정으로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아쉬움 없는 인사 아닐까. 언젠가 나도 그처럼 사라질 수 있기를, 그 마지막 시간을 위해 지금부터 준비하고 싶었다.

다시 <글로리아 벨>의 마지막 장면이다. 아놀드에게 제대로 이별을 선언한 후 친구 딸의 결혼식 파티에 참석한 글로리아. 같이 춤을 추자는 친구의 제안에 고개를 젓던 그는 음악이 부르는 힘에 이끌려 댄스홀로 나선다.

그리고는 ‘글로리아, 다른 사람 다른 일들에 신경 쓰지 말고 느긋해져’라는 주문 같은 노랫말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상처를 남긴 사랑을 정리하고 다시 행복해지겠다는 다짐만큼 그의 춤사위는 에너지가 넘친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끼고 혼자서도 춤을 추며 즐거워했던 이전의 글로리아로 돌아온 것이다. 브라보! 글로리아가 다시 용기를 내어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보고 있는 나도 행복해졌다.

김현주 우먼센스 편집국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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