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문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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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경을 칠 놈'은 욕이다. 가끔 동네 어르신들이 아이들을 혼낼 때 쓰곤 하지만, 유래를 알고 나면 함부로 할 말이 아니다. 고대 중국엔 몸에 흠집을 내는 형벌 다섯 가지가 있었다. 이른바 오형(五刑)인데, 그 첫째가 경()이다. 몸에 '먹으로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묵(墨)으로도 불렸다. 대개 이마에, 간혹 뺨에 새겼다.(조선 연산군 시절 노비가 도망치다 잡히면 남자는 왼쪽 뺨에 노(奴)자를, 여자는 오른쪽 뺨에 비(婢)자를 새겼다.)

묵형을 받은 자는 경도(徒)라 하여, 평생 얼굴을 들지 못했다. 진시황이 자신에게 불경한 자를 잡아다 경을 친 것은 유명하다. 경이 형벌로 굳어지면서 문신(文身)은 범죄의 상징이 됐다.

중국에서 문신이 처음부터 금기시된 것은 아니었다. 문신의 기원은 은나라 때다. 문(文)이란 글자도 '문신한 사람'을 본뜬 은나라 상형문자에서 나왔다. 은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주나라는 은의 습속을 모두 오랑캐의 것으로 매도했다. 문신도 덩달아 오랑캐 문화가 됐다.

인류의 문신 역사는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년 알프스에서 기원전 3300여 년 사냥꾼의 시체가 얼어붙은 채로 발견됐다. 시체엔 십자가.직선 등 58개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기원전 2000년 이집트 미라에서도, 잉카.러시아 미라에서도 문신이 등장한다. 청동기 시절, 이미 문신은 세계를 휩쓴 패션 코드였던 셈이다.

문신은 인류 보편적 문화행위였다. 종교적 상징으로, 때론 성적 유혹으로, 혹은 충성의 표시이자 특정 단체의 아이콘으로 사용됐다. 고대 로마 때 범죄자와 노예의 탈주를 막기 위해 쓰이면서 문신은 서양에서도 금기가 됐다. (스티브 길버트 '문신, 금지된 패션의 역사')

'세계 문신대회'(76년 휴스턴) '문신 엑스포'(82년 퀸 메리호)를 거쳐 문신이 현대의 패션 코드로 다시 등장한 것은 90년대. 미국 M-TV의 록밴드들에서 시작한 문신 패션이 스포츠.연예 스타들에게 퍼지면서다. 최근엔 유명 브랜드들이 자사 로고를 문신 패션화하기도 했다. 미국 피부과학회에 따르면 요즘 미국인 4명 중 1명이 문신족이다. 18~24살에선 36%나 된다.

문신 패션은 이번 월드컵에서도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했다. 형형색색의 얼굴로 가득 찬 경기장은 문신 축제를 방불케 했다.

여름이다. 곳곳에서 문신 패션이 활개 칠 터이다. 동네 어르신들이 보면 '경을 칠' 일이지만, 문신족들은 당당하다.

이정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