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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현철의 시선

자사고, 없애고 난 이후가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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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지난 20일 전북 전주에 있는 자립형 사립고인 상산고의 자사고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전북 교육청 발표가 나왔다. 같은 날 오후엔 경기 안산 동산고가 같은 결정을 받았다. 모두가 다음 달 초까지 예정된 올 자사고 평가의 결과를 짐작케 할 수 있는 결과들이다. 자사고들은 5년마다 평가를 받게 돼 있다. 법에 따라 설립되고 운영되므로 당연한 일정이다. 문제는 그 결과가 탈락 일변도라는 것이다.

전국 최고점수 받는 상산고가 #자사고 유지 조건 못 갖췄다면 #교육이 지향하는 바는 뭔가

전국 자사고 42곳 중 올해 평가를 받는 25곳 대부분이 탈락의 쓴맛을 볼 것으로 전망된다. 평가 주체인 각 시도별 교육청이 합격 기준을 크게 올렸기 때문이다. 70점이던 전북은 80점으로, 60점이던 다른 지역은 70점으로 각각 높아졌다. 이를 두고 일찌감치 ‘자사고 폐지’라는 문재인 정부의 교육 공약을 지키기 위해 교육부와 진보 교육감들이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신호라는 해석이 나온 바 있다. 이번 상산고와 동산고의 자사고 탈락으로 그 해석이 사실이라는 심증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특히 상산고의 탈락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상산고는 기업이 아닌 순수 교육자본이 운용하는 유일한 자사고다. 2003년 자사고로 전환된 뒤 모범적인 학교의 전형이라 불려왔다. 자사고 중 유일하게 국어·영어·수학 수업 비율이 50%를 넘지 않는 학교다. 그러면서도 매년 의대와 서울대 입시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공부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능 체제에서 만점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라는 명성도 얻었다.

또 홍성대 이사장이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려운 여건의 학생들을 직접 선발하는 등 교육부가 정한 기준에 맞춰 충실히 운영되는 학교였다. 울릉도 출신으로 첫 서울대 입학생이 된 박민혁 군이나 탈북자로 이화여대 간호학과에 입학한 이혜심 양 등은 상산고가 사회적 배려 대상자에게 쏟은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여기엔 이사장의 일가족은커녕 사돈의 팔촌도 학교에 발도 들일 수 없는 투명한 인사와 ‘수학의 정석’으로 평생 번 돈을 매년 학교에 쏟아붓는 설립자의 열성이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전 국민의 골치를 썩이는 사교육 문제도 상산고엔 없다. 학교 수업만 잘 따라가면 수능 대비가 절로 되기 때문이다. 학원을 가는 일부 학생들도 수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서 간다. ‘공부하라’고 학교에서 강요하지 않으니 학생들은 가장 자율적인 3년을 누릴 수 있다. ‘빡세게’ 공부해야 하지만 동시에 가장 만족스러운 고등학교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전북교육청이 이번에 매긴 상산고의 점수는 79.51점으로 기준 점수(80점)에 0.39점 모자랐다. 5년 만에 갑자기 오른 기준 점수에 막혀 탈락한 셈이다. 이러니 당장 형평성 문제가 제기된다. 전북만 기준 점수가 80점인 것은 전국에서 점수가 가장 높은 상산고를 탈락시키려는 의도적인 행태라는 것이다. 상산고는 5년 전 자사고 평가에서도 전국 최고점을 받았다. 전교조 위원장을 지낸 정의당 정진후 전 의원조차 “교육부 표준안에 맞춰 엄격히 평가한다면 전국 자사고 중 상산고만 통과했을 것이다”고 했을 정도다. 과정의 공정성도 문제다. 내내 3%를 권고해오던 사회적 배려 대상자 선발 비율을 갑자기 10%로 높여 점수를 많이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상산고 국중학 교감은 “아마도 이번 전체 자사고 평가에서도 상산고의 점수가 가장 높을 것”이라며 “이런 학교를 탈락시키는 건 곧 전체 자사고를 없애겠다는 말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상산고 탈락이 결국 자사고 전체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 정부는 자사고를 없애고 일반고로 바꿔 교육 평등을 이루자는 의식이 강하다. 하지만 자사고를 없앤다고 해서 교육 평등이 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대학 서열화나 공무원 경쟁 구도 해소 등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자사고라는 통로 하나를 없애면 불안한 학부모들의 사교육이 더 기승을 부리고, 대입 불확실성과 경제적 부담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교사와 학생의 자율성을 존중받는 학교가 사라지고 공교육의 붕괴만 부추길 뿐이다. 교육의 목적은 사라지고 형식적인 과정의 평등만 남게 된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우고 들어오는 건 학생부종합전형에서 지적됐듯 돈과 권력이 되기 십상이다.

다행히 상산고의 자사고 지위 탈락은 남은 절차가 있다. 학교를 대상으로 하는 청문과 교육부 장관의 동의다. 교육부는 7월 이내에 신속히 결정한다고 한다.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인 평등을 이루고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길인지에 대한 유은혜 부총리의 현명한 판단만 남게 됐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