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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정책 궁극목표는 통일"|정치외교사학회 세미나 『북방관계의 외교사적 재조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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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국내에서의 문익환 목사 입북사건 등 연이은 입북사태와 국외에서의 중국 천안문사태 등으로 주춤했던 우리의 대북방교류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단장으로 한 40여명의 경협사절단이 소련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2일 귀국하는 등 최근 다시 본궤도에 올라서고 있는 가운데 북방정책을 정치외교사적으로 재조명한 세미나가 열려 만심을 끌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회장 홍정호 이대교수)는 지난달 28∼29일 서울 세종호텔에서 「한국북방관계의 정치외교사적 재조명」이란 세미나를 개최했다.
정부의 7·7선언과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북방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의 북방정책전망이나 과제 등에 관한 학술회의는 여러 번 있었으나 우리의 북방정책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학술회의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청일전쟁에서 노일전쟁, 일제, 6·25 동란에 이어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북방관계와 앞으로의 전망 등에 대해 발표했다.
「한국북방관계의 정치외교사적 재조명」을 발표한 이대 홍정호 교수는 『북방에 대한 개념의 재정립이 중요하다』고 전제하고 『「북방」경계선은 압록강·두만강이 아니라 휴전선이며 「북방국가」란 가장 중요한 북한을 필두로 한 중소·동구제국이다』고 규정, 우리의 북방관계는 궁극적 목표가 통일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따라서 북방관계증진을 위해선 북한과의 대화추진에 저해요인을 없애고 지난날 우리의 북방외교를 철저히 연구, 우리의 외교철학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파리대 문희수 교수는 「청일전쟁과 북방관계」라는 주제발표에서 『동학란으로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면서 조선은 본격적으로 북방외교를 추진하게 된다』고 말하고 『그러나 일본의 승리로 다시 러시아로 북방정책의 관심을 돌려 아관파천 사태까지 맞게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균형으로 더 이상 진전없이 현상유지를 하게된다』고 설명했다.
「노일전쟁 전 북방관계」를 주제로 발표한 영남대 우철구 교수는 『1898년부터 1903년까지의 북방관계는 대 러시아관계』라고 전제, 『조정은 러시아에 일본을 견제해주고 군사적·경제적 협조를 얻기를 기대했다』고 설명했다. 우 교수는 그러나 러시아가 한국정부에 대해이권만 강요할 뿐 군사·경제적 협조는 회피해 한국국민, 특히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의 반발을 사게돼 우리의 북방정책은 러시아 배척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한남대 이창훈 교수는 『노일전쟁 발발 직전 한국은 러시아와 협의, 중립을 선포했고 러시아의 패전 후에도 독립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에 대한 기대를 끝내 저버리지 못했으나 러시아는 외몽고에서의 특권을 일본으로부터 인정받는 대가로 한국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강조, 현재 소련과의 북방정책에 있어서도 소련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우리와 접촉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또 대만정치대 호춘혜 교수는 『일제하에서 간도 한인은 중국의 내·외정에 어려움을 주는 대상이 되었고 이는 중일 외교분쟁으로, 나아가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으로 치닫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했다.
해방부터 6·25까지의 대북방관계에 대해 연세대 허만호 교수는 『소련은 「사회주의 혁명수출」이란 이념적 요인과 「자본주의국가들의 포위로부터의 탈출」이란 지정학적 요인으로 한반도에 접근해 왔고 중국은 지리적인 이유에서 소련보다 더 큰 규모로 한국문제에 개입했다』고 말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북통일에 접근하는 것은 비 정치부문의 교류확대로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한이 중소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헝가리 국제문제연구소의 카롤리 펜들러 박사는 「오스트리아-힝가리 제국자료를 통해 본 19∼20세기 한국사」라는 발표에서 『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과 지금의 상황은 아주 비슷하다』고 말하고 『그 당시의 경험, 즉 한국인과 한국역사에 대한 위기상황에 대한 재조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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