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경제 변화에 적절히 대응” 금리인하 깜빡이 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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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오전 서울 부영태평빌딩에서 열린 ‘한국은행 창립 69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이날 이 총재는 기념사에서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대해 경제 상황 변화에 따라 적절히 대응해 나가겠다며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뉴스1]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오전 서울 부영태평빌딩에서 열린 ‘한국은행 창립 69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이날 이 총재는 기념사에서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대해 경제 상황 변화에 따라 적절히 대응해 나가겠다며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뉴스1]

‘거함’(한국은행)이 ‘기수’(통화정책 방향)를 틀 태세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을 내비쳤다. 미·중 무역분쟁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수출이 감소하는 등 한국 경제를 뒤덮은 먹구름이 짙어지면서다. 이 총재는 12일 한은 창립 69주년 기념사에서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대해 “경제 상황 변화에 따라 적절히 대응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내외 경제여건이 엄중한 상황에서 정책당국은 성장 모멘텀이 이어질 수 있도록 거시경제를 운영해야 한다”며 “경기 대응을 위한 거시경제 정책은 정책 여력과 효과를 신중히 판단해 내실 있게 추진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미·중무역 분쟁, 수출 감소 먹구름 #기존 “아직 때 아니다”서 변화 #이르면 8월 금리 내릴 가능성 #일각 “선제적 인하 타이밍 놓쳤다”

경기 회복이 더디거나 상황이 나빠지면 금리인하 카드를 쓸 수 있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공격적인 재정정책을 펼치는 정부와 함께 경기 부양을 위해 돈줄을 풀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기존의 입장과는 달라진 뉘앙스다. 이 총재는 그동안 통화정책 완화(금리인하)를 주문하는 안팎의 목소리에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선을 그어 왔다.

◆홍남기 “통화 완화적 기조 진전”=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이 총재의 발언에 대해 ‘진전’이란 언급을 내놨다. 홍 부총리는 이날 경제활력대책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통화 완화적 기조 가능성을 좀 진전해 말한 것 아닌가 이해한다”고 말했다. 금리를 올리고 내리는 통화정책은 가계와 기업·정부 등 모든 경제주체에 전방위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만큼 쉽게 움직일 수 없다. 거함의 움직임에 비유되는 이유다. 국제통화기금(IMF)·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와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은 한은에 완화적 통화정책을 주문해 왔다. 지난달 31일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선 금리인하를 주장하는 소수의견도 등장했다. 시장은 이미 훨씬 앞서가 있다. 장기 국채 금리가 한은의 기준금리(연 1.75%)를 밑돈다.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지난달 29일 이후 줄곧 기준금리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다. 2013년 3월 이후 6년2개월 만에 처음이다.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12일 연 1.469%까지 떨어졌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를 기정사실로 하는 채권시장의 움직임이다.

◆Fed 조기 금리인하 전망도 영향=한은이 금리인하의 적절한 시점을 놓쳤다는 ‘실기’ 논란도 나온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장기간의 기준금리 동결로 시장금리가 정책금리보다 낮아지는 시장 왜곡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은 “선제적인 금리인하 타이밍은 놓친 것으로 판단된다”며 “경기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계와 기업 부담을 경감할 금리인하를 적극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은이 금리인하를 향한 문을 좀 더 연 것은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한 우려를 방증한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으로 세계 교역 자체가 위축될 수 있어서다. 반도체 경기 회복세가 더딜 수 있다는 전망에 수출에 대한 경고음도 커지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예상보다 빨리 정책금리를 낮출 수 있다는 전망도 한은에 운신의 폭을 넓혀 준다. 영국의 투자은행인 바클레이즈는 Fed가 올해 두 차례 금리인하에 나설 것이란 전망을 했다. 현재 Fed의 정책금리(연 2.25~2.5%)는 한은의 기준금리보다 최고 0.75%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Fed가 먼저 금리를 내리면 그만큼 한국과 미국의 금리 차이가 줄어든다. 한은으로선 뒤따라 금리를 내릴 때 부담을 덜 수 있다. 오는 18~19일(현지시간)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논의 결과가 주목되는 이유다.

한은은 올해 경제전망 수정치를 다음달 중순 내놓을 예정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한은이 현재 2.5%인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소폭 낮춘 뒤 금리인하 시기를 저울질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추가경정예산(추경) 통과와 재정집행 효과에 따른 경기 상황을 살펴본 뒤 한은이 움직일 것이란 관측이다.

한은의 금리인하 시기가 예상보다 앞당겨질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이 총재의 (인하 시사) 발언에 홍 부총리가 가세하며 금리인하 논란은 뜨거워졌다”며 “8월에도 금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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