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륙순간 "펑" "펑" "펑" 3번 폭음|본사 두 특파원이 본 KAL기 참사현장|중간동체 불타 흔적도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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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트리플리=주원상·배명복 특파원】트리폴리공항의 KAL기 추락사고 현장은 부서진 DC-10기의 동체가 괴물처럼 방치돼 있으며 사망자와 부상자가 안치되거나 입원 치료받고 있는 트리폴리시내 각 병원은 검게 탄 시체와 화상을 입은 부상자들의 처참한 모습이 비행기사고의 무서움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사고지점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중간동체는 불타 없어진 채 조종석과 1등 석이 한 무더기로 왼편에 뒤집혀 있고 꼬리부분이 오른쪽에 처박혀 있었다.
엔진 하나는 꼬리부분에서 50m, 다른 하나는 70m가량 떨어진 채 파손돼 있었다.
기체가 처음 추락한 곳은 올리브나무가 많은 과수원이었기 때문에 나무가 제동역할을 해 더 큰 피해를 내지 않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블랙박스 찾아내>
27일 발생한 KAL803편 추락사고로 인한 부상자와 사망자의 유해가 빠르면 30일(현지시간)중으로 서울로 돌아간다.
사고수습 대책 반은 이날 리비아 정부당국과 필요한 절차를 끝내는 대로 즉시 사고조사에 필요한 1∼2명을 제외하곤 전원 귀국한다고 밝히고 사망자와 부상자의 동시수송을 위해 추가로 서울에서 특별 기 1대가 29일 중 이곳에 도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날현재 파악된 이번 사고의 사망자는 탑승객 중 72명(한국인67명, 일본인 1명, 리비아인 4명 등)이고 부상자는 92명이다.
사고현장 주변에서 사고로 죽은 리비아인 6명을 포함하면 사망자는 78명이다.
부상자중 중상자는 10명 정도이나 생명이 위독한 부상자는 1명인 것으로 알려졌고 신원확인이 가능한 사망자는 6명 정도뿐이고 나머지는 전혀 식별이 불가능한 상태다.
사고수습대책 반은 사망자를 서울로 운 구한 뒤 유족들의 도움을 받아 신체의 특징이나 휴대품 등으로 나머지 사망자의 신원을 식별할 예정이다.
당초 대우건설 캠프에 무사 생환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이한수씨와 병원에 입원치료중인 것으로 전해졌던 조은수씨는 28일 실종된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리비아당국의 사고조사위원회는 28일 오후 사고현장에서 블랙박스 1개를 찾아냈으나 이 블랙박스가 보이스레코더 인지 플라이트레코더 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가벼운 타박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중인 KAL기 기장 김호준씨는 충격에서 아직 완전히 깨어난 상태는 아니지만『나는 관제탑에서 지시하는 대로 착륙했는데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이상열 주 리비아대사에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한규 항공관리국장은『현재로서는 사고원인에 대해 추측이 가능할뿐 조사가 끝나기 전에는 정확한 사고원인을 알수 없다』고 말했다.
사고원인과 관련, 리비아의 모하마드 아부기레스 민항 국장은 기자회견에서『항공기가 활주로에 접근할 때 동체중심을 활주로 중앙에 맞추도록 유도하기 위해 설치돼 있는 장치가 적절히 작동하지 않는 상태였다』고 밝히면서『이 착륙유도장치가 지난 수개월간 고장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이같은 상황을 공항에 착륙하는 모든 민항 기에 통보했으며 사고기의 조종사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모바라크 샤막 리비아 교통장관은 사고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한·리비아 공동조사단을 구성했다고 밝혔는데 앞서 리비아 측 조사위원회의 책임자는 그 동안의 조사 상황으로 미뤄 사고가 조종사의 실수로 발생했는지 아니면 기체결함 때문인지 확실히 언급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샤막 장관은 기자들에게 KAL 803편 조종사에게『안개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했다』고 전하면서『관제탑에서 KAL기에 제공한 마지막 정보는 시계가 50m로 떨어졌다는 내용이었으나 그는 스스로의 장비들을 믿고 착륙을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뒤부터 불길 번져>
사고 당시 2O여명을 구조해 낸 대우의 윤원현씨(31·중기 부)는 사고순간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윤씨에 따르면 사고 기는 모두 3번의 폭발음을 냈으며 착륙 10분전까지도 전혀 비행에 이상이 있음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윤씨는 사고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나는 사고기의 12번 열 H석에 앉아 있었다. 예정도착시간(7시5분·현지시간)을 30여분 남겨 놓고 곧 트리폴리에 도착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안전벨트를 매고 착륙을 준비했는데 다시 20분이지나 곧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주변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지만 이제 도착하는 구나 하고 생각하고 창밖을 보니 비행기가 구름을 벗어나자마자 의당 보여야 할 활주로가 아니라 숲과 나무들이 보여 직감적으로 추락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 의자 밑으로 몸을 숨겼다. 이제 죽는 구나 하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갑자기「펑」하는 소리가 들렀으며 뒷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의자와 사람들이 마구 앞으로 쏟아졌다.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 다시「펑」하는 폭발음이 들렸으며 비행기 전체가 흔들리면서 신음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몸이 다치지 않아 살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앞쪽에서 환한 빛이 들어왔다.
얼른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비행기 앞부분이 훤하게 뚫린 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가는데 승객들이 서로 나가려고 밀고 끌고 당기면서 부상한 사람들의 고통스런 신음소리들이 들려 와 생지옥을 연출했다.
겨우 앞쪽으로 나갔더니 비행기의 윗 부분이 하늘을 향해 들러져 있어 땅과의 높이가 3∼4m는 되어 보였다.

<엇갈린 생사 숙연>
어떻게 내려갈까 고민하는데 또다시「펑」하는 폭발음과 함께 몸이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정말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잠시 후 찬 공기가 느껴졌다.
살아난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비행기를 보니 동체 뒤 목에서부터 불길이 치솟았다.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고 정신없이 나도 승객들을 끌어내려고 다시 비행기로 달려갔다.
윤씨는 당시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여기저기서 경적 음이 울리며 리비아공항당국자들이 몰려왔다며 자신이 겪었던 당시의 상황을 몸서리치며 회상했다.
또 생존자중의 한사람인 김종원씨(44·동아건설미장공)는 사고당시 마지막 착륙방송이 나온 다음에 비행기가 땅에 닿기까지는 5분 정도 걸리는데 이번에는 30초 정도 걸려 나무가 보이고 땅이 보였다고 말하고 10초 후 창문 옆으로 불길이 보였다. 기장이 기체에 이상 있어 착륙 전 급강하했다는데 급강하는 없었다며 악몽 같았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구조 3시간 걸려>
사고가 나자 트리폴리시내의 소방차·앰뷸런스가 총동원돼 부상자를 치료하고 구조작업에 나섰으나 구조작업에는 리비아석유회사 소방차와 트리폴리시가 새로 구입, 각 병원에 배정하려고 준비했던 구급차까지 모두 동원돼 부상자수송과 구조작업은 사고 후 3시간만에 완료됐다. 병원에서 만난 피해자들의 모습은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리비아 발령을 받아 부임하다 공항도착과 함께 목숨을 잃은 33세 한창 나이의 회사원, 보고픈 아빠를 그리며 엄마 손을 잡고 비행기에 올랐다. 끝내 그리운 아빠를 영영 못 보게 된 11세 소녀, 먼저 현지에 부임한 남편과 합류하기 위해 리비아로 떠났다 중화상을 입고 병원에 갇혀 신음중인 젊은 부인 등 KAL803편 사고에 얽힌 숱한 비극의 사연은 전해 듣기에도 안타까운 모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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