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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인인사이트] "여성 아닌 이름 석자로 살라" 백년 전의 나혜석이 말을 걸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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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외도를 해서 이혼 당하고, 조선 땅을 시끄럽게 만든 스캔들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제가 본 나혜석은 한국에서 최초로 배운 여자가 무엇을 하고 살 수 있는가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입니다.”

_장영은 문학연구자, 폴인( fol:n)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중에서

[폴인을 읽다]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나를 선택했다

“공산주의 영향을 받아서 중국 여자들은 남자 무서운 줄 몰라요.”

어느 봄날,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가 한 말이었다. 귀를 의심했다. 이윽고 눈도 의심했다. 문제 제기하는 학생은 없었고 수업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교수의 표정도 편안했다. 한 대 맞은 듯이 얼얼한 채로 강의실을 나와서 버스를 탔다. 이어폰에서는 자우림이 부르는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내 속에 가시가 너무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다는 가사가 아팠다. 순간 튀어나온 감성에 나 자신조차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더 진심 같았다. 내 감정을 의심할 정도로 수많은 가시가 내 속에 있던 것이다. 그 강의실에서 나는 손을 들 수 없었다. 나는 여자이지만, 여자인 것만은 아니었다. 남들 하는 거 다해보고 싶은 20대이자, 교수에게 잘 보이고 싶은 학생이자, 균열을 내는 주체가 아니라 방관자가 되고 싶은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손을 들지 않았고, 그래서 눈물이 났다.

딱 한 번만 넘기면 되는 문제였다. 별것 아닌 해프닝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스스로가 딱했다. ‘성공’하려면 이깟 일쯤은 웃고 넘길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그 딱 한 번이 문제였다. 딱 한 번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존재를 부정당하고도 넘기는 일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 될 것은 뻔했다. 그렇게 저 교수는 세월을 보내온 것이다. 그 세월에는 존재를 부정당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한 바를 내뱉지 못하는 미래가 그려졌다. 그를 위해서 이렇게 아등바등 버틸 이유는 없었다. 나는 닳고 있었다. 성적인 농담이 오가는 자리에서 센 척하고, 애인 앞에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고, 원치 않은 외모 평가를 웃으며 넘기는 순간마다 나는 조금씩 닳아가고 있던 것이다. 닳는 것이 싫어서 나를 지키기로 했다. 그렇게 다른 세계로 진입해버렸다.

나는 확신한다. ‘나답게 살아야지’하고 삶을 꾸려나가는 이는 없다고. 세상이 자아를 지킬 수 없도록 만들 때 인간은 선택한다. 자아를 포기할지, 세상을 바꿀지. 세상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이는 대단한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아를 위한 선택을 한 것뿐이라고 믿는다. 그 선택이 대단하지 않은 만큼 고통으로 점철된 삶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견딜 수 없는 세상과 투쟁하기로 마음먹으면 그는 그대로 자유롭다. 적어도 내적 갈등을 이겨내고 자아는 견고한 하나로 자리하니까. 생각해보면 자우림의 가시나무를 들은 날, 나는 처음으로 해방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폴인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중 나혜석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폴인]

폴인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중 나혜석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폴인]

최초의 여자, 투쟁의 역사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_나혜석<경희>(1918) 중에서

새로운 시대는 왔습니다. 모-든 헌 것을 거꾸러치고 온-갖 새것을 세울 때가 왔습니다. 모든 죄, 모든 악의 사라질 때가 왔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개조하여야 될 때가 왔습니다. 그러면 무엇부터 개조하여야겠습니까? 무엇 할 것 없이 통틀어 사회를 개조하여야겠습니다. 사회를 개조하려면 먼저 사회의 원소인 가정을 개조하여야 하고 가정을 개조하려면 가정의 주인 될 여자를 해방하여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_김일엽이 창간한 잡지 <신여자> 창간사 중에서

이 땅에서 여성들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학교, 직장, 친구·연인 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갈등은 일상적이며, 매 순간 선택해야 한다. 어떤 순간에는 자아를 택해서 쓴소리를 뱉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세상과의 조화를 위해 웃고 넘기기도 한다. 그런데, 전 생애를 걸어 자아를 위해 투쟁한 여성들이 있었다.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 걸출한 문인이면서 승려였던 김일엽, 사회주의 혁명가 허정숙, 최초의 여자 변호사 이태영, 코스모폴리탄 천재 화가 천경자.

특히나 나혜석과 김일엽은 어떤 상황이든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거부하고 핍박할 때, 나혜석과 김일엽은 끊임없이 자신이 누군지를 고민했고, 찾았고, 기록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핍박과 고통 속에서 서로를 응원했고 지지했다. 김일엽은 차가운 세상의 시선에 상처받은 나혜석을 위로했고, 김일엽이 스님이 되어 아들을 내쳤을 때 그를 대신해 아들을 따스하게 맞아준 것은 나혜석이었다. 나 또한 페미니즘을 접한 후 크고 작은 투쟁이 삶에 들어왔음에도, 주변의 친구들이 있어 든든함을 느낀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기에, 진심으로 사랑하고 응원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들의 연대는 단순한 친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거울 같은 존재이기에, 서로의 고독과 고통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평생을 함께 걸어갈 동지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다.

폴인(fol:in) 웹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는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의 표지. [사진 폴인]

폴인(fol:in) 웹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는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의 표지. [사진 폴인]

나혜석과 김일엽은 무엇인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아와 세계가 갈등할 때, 자아를 택한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명료한 선택이 그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끊임없이 되살아나, 많은 여성의 희망이 되고 있다. 장영은 문학연구자가 쓴 폴인(fol:in)의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에서는 가십과 오명으로 덮여있던 이들의 삶을 재조명한다. 식민지 조선 여성이 당대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아를 찾아가는 삶을 보여준다. 화제가 된 <나혜석, 글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해설한 장영은 문학연구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의 삶 마디마디에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여자가 아닌 나로 살아가기

누구나 처음이 있다. 삶에 대한 확신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이기에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최초의 삶이 있고 그를 따라간 다음이 있다면, 보다 안심하고 인생이라는 여정의 첫 발걸음을 뗄 수 있다. 처음 페미니즘을 만난 후, 불안감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다. 내 삶이 정상 궤도에서 이탈할 것만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여성이 아닌 자기 이름 석 자로 당당히 사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며 조금씩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나는 살아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감정과 생각을 내뱉으면서 존재하고 싶다고. 그래서 여성이 아니라 내 이름 석 자로 살고 싶다고.삶에 대한 확신은 언제 취업하고, 결혼하고, 집을 사고, 차를 사는 것에 대한 계획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존재하고자 고민하기 시작할 때 생기는 것이라 믿는다. 삶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이들이라면, 폴인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떨림을 느껴보기를 추천한다.

김아현 객원에디터 folin@foli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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