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방향 잡아준 목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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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 천주교 주교단이 문규현 신부를 입북시킨 일부 사제들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데 대해 깊은 안도와 공감을 느낀다. 주교단은 우리 나라 천주교의 최고 의결 기관이며,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한국 천주교 전체의 공식적인 의사와 입장을 뜻하기 때문에 그 의의는 더욱 큰 것이다.
천주교내 비공인 임의 단체인 정의 구현 사제단 소속 일부 사제들의 실정법을 무시한 행동은 그들이 소속된 교단에서도 용납 받지 못한 오류임이 입증된 것이다.
무려 이틀에 걸친 장고와 숙의 끝에 결론이 나온 것을 보면 실정법과 교회법의 괴리 속에서 상당한 고민과 논의가 있었음이 엿보인다. 우리가 처해 있는 분단 현실에서 이 문제가 갖는 심각성을 고려할 때 세속적인 실정법 속에 더 비중을 둔 주교단의 선택과 결단이야말로 과연 장로다운 원려의 소산으로 평가해야겠다. 주교단의 이러한 결정은 2백만 천주교 신도는 물론 우리 국민 전체의 통일 논의에 영향을 파급하리라 믿는다.
우리가 문 신부의 입북과 이를 주선한 일부 사제들의 행동에 특히 실망과 우려를 금치 못하는 것은 그들이 많은 신도들의 존경과 추종을 받는 성직자라는 특수한 신분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매사에 신중하고 수범해야할 성직자가 일부 과격한 학생들이나 환상적 통일 지상주의자들에 동조하여 마찬가지의 논리와 행동을 보여서는 안될 것이다.
주교단은 이로 인한 가공할 사태의 예방을 위해 쐐기를 박은 셈이다.
주교단 결정에 대해 일부 사제들의 반발과 이로 인한 교단 내의 이른바 보혁 갈등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 사제들은 좀더 냉정한 상황 판단과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최소한 통 일은 열망이나 열정 또는 신앙적 양심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냉엄한 현실만은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물며 합법적인 정부와 국민에 의해 제정된 국법까지 깡그리 묵살한 채 아직도 혁명 수출의 망상으로 대남 전략을 획책하고 있는 북한에 숨어들어 가 「존경하는 수령님」 앞에서 나라를 헐뜯고 「미제 추방」을 외치는 철부지의 소리에 맞장구나 치는 것은 오히려 통일의 길을 역행시킬 위험스런 행동이다.
그것은 나라 안으로는 국론 분열에 의한 사회 혼란을 더욱 확대 재생산하는 일이요, 북측에는 대남 전략의 적절한 이용물로 스스로를 제공하는 결과를 빚는 일이며, 북한 지도층에 위험스런 오판을 하게 할 위험성마저 없지 않은 것이다.
통일에 대한 열정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오히려 고무하고 격려할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일은 확고한 원칙과 고도의 전략이 요구되는 외교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정부와 정치인에게 통일 작업을 촉구하고, 사회는 그들에게 지혜를 보태 주는 쪽으로 그 열정과 열망은 방향을 잡아야 순리다. 그런 점에서 주교단이 7·7선언의 세부적 실천을 촉구한데 대해 우리도 전적으로 의견을 같이한다.
국민이 선택한 정부와 국법을 묵살하는 것은 곧 국기를 흔드는 행위다. 일부 사제들은 「신앙적 양심에 따른 결단」이라 했지만 국기를 뒤흔드는 신앙이나 양심은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교단은 사제들에 대해 「사법적 처리도 감수하라」는 준엄한 신앙적 결단을 내렸다고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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