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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등산사] 피로 물든 베이스캠프···괴한 총에 11명이 쓰러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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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등산사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높은 산, 낭가파르바트(8126m). 이 산이 있는  파키스탄의 길기트-발티스탄주는 여행경보 3단계(적색) 철수권고 지역이다. 한국인 장모씨가 무장세력에게 납치된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동부(2단계·황색·여행자제)의 여행경보가 한 단계 높다. 외교부는 13일 부르키나파소 동부를 3단계로 올렸다.

■ 낭가파르바트의 비극 #2013년 6월 한밤에 16명 급습 #중국·슬로바키아·우크라이나… #외국 등반가 11명 총으로 살해 #파키스탄 탈레반 "우리 소행"

파키스탄 대부분은 이 ’철수권고‘와 특별여행경보 2단계에 해당한다. 특별여행경보 2단계는 기존 여행경보와는 관계없이 ‘즉시대피’를 뜻한다. 그럼에도 낭가파르바트 지역은 파키스탄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졌다.

우리나라 여섯 번째 8000m급 14개 봉우리 완등자인 김미곤(47) 대장은 “낭가파르바트 등정은 자연의 위험과 더불어 인간의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고 말했다. 김 대장은 낭가파르바트에 모두 세 차례(2005·2016·2018년) 갔다. 현지 우르두어로 ‘벌거벗은 산’이라고도 하고, 5명 중 1명은 돌아오지 못해 ‘죽음의 산’이라고도 불리는 낭가파르바트. 김 대장이 말한 '인간의 위험'은 무엇이었을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칼라시니코프 소총. 2013년 6월 낭가파르바트 베이스캠프를 덮친 무장괴한들은 이 소총으로 등반가 11명을 사살했다. 중앙포토

칼라시니코프 소총. 2013년 6월 낭가파르바트 베이스캠프를 덮친 무장괴한들은 이 소총으로 등반가 11명을 사살했다. 중앙포토

파키스탄 북부에 있는 낭가파르바트(8126m)는 '벌거벗은 산' 혹은 이정표에서 보듯 '죽음의 산'으로 불린다. 2013년 6월 이 산 베이스캠프에 무장괴한이 닥쳐 등반가 11명을 사살했다. [AP=연합뉴스]

파키스탄 북부에 있는 낭가파르바트(8126m)는 '벌거벗은 산' 혹은 이정표에서 보듯 '죽음의 산'으로 불린다. 2013년 6월 이 산 베이스캠프에 무장괴한이 닥쳐 등반가 11명을 사살했다. [AP=연합뉴스]

칼라시니코프 소총 든 16명의 괴한

2013년 6월 22일. 파키스탄의 셰르 칸은 고소 증세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캠프1(5050m)에서 디아미르 베이스캠프(4300m)로 내려가 침낭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낭가파르바트에는 이 디아미르 베이스캠프와 루팔 베이스캠프가 있다.

얼마 뒤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그는 텐트를 열고 상황을 살폈다. 러시아산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든 몇 명이 베이스캠프를 서성이고 있었다. 베이스캠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오후 9시30분경이었다.

“난 미국인이 아니오. 아니라니까.”
리투아니아에서 온 에르네스타스(44)가 이 무장괴한들에게 소리쳤다.
“탈레반, 알카에다, 저항하지 말라.”
괴한들은 영어로 이 말을 반복했다. 그들은 칼로 베이스캠프의 텐트를 찢으며 등반대원들을 내몰았다.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 베이스캠프. 지난 2013년 6월 이곳에서 무장괴한들이 11명의 등반가들을 사살했다. 중앙포토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 베이스캠프. 지난 2013년 6월 이곳에서 무장괴한들이 11명의 등반가들을 사살했다. 중앙포토

당시 낭가파르바트에는 폴란드의 알렉산드라 드지크(당시 31세)가 이끄는 다국적 등반대와 중국·슬로바키아·파키스탄 등 원정대 50여 명이 있었다. 일부는 등반을 시작해 낭가파르바트의 캠프1과 그 위에서  있었고 나머지 20여 명은 베이스캠프에서 고소적응을 하거나 좋은 날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칸은 내셔널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를 통해, 괴한들은 우르두(Urdu·파키스탄 공용어)·시나(Shina·낭가파르바트가 있는 길기트발티스탄 지역의 언어)·파스토(Pashto·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지만 파키스탄과 이란·타지키스탄 일부 지역에서도 사용한다) 언어를 섞어 썼다고 밝혔다.

그들은 왜 다양한 언어를 썼을까. AFP의 보도에 의하면 6월 초순 브루카로 얼굴을 가린 두 명의 남자가 길기트발티스탄 지역에 나타났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지휘관급 탈레반이었다. 이들은 무장세력을 꾸렸다. 모두 16명이었다.

김미곤 대장은 “낭가파르바트로 가는 길에는 다른 8000m급 고봉들과 달리 마을이 산재해 있다”며 “현지 주민들은 같은 주민들, 특히 경찰 중에도 탈레반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탈레반이 곳곳의 마을에서 세력을 규합했던 것이다.

베이스캠프에서 미국인을 납치하라 

이들은 낭가파르바트에서 등반가를 납치할 계획이었다. 대상은 미국인이었다. 당시 낭가파르바트에 미국 원정대는 없었다. 미국인이라면 단 한 명. 중국인이면서 미국 시민권자인 첸홍루(陳宏路·50)였다. 첸을 체포된 탈레반 지휘관과 맞교환하거나 석방 조건으로 돈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탈레반이 어떻게 첸의 정보를 알아냈는지는 불분명하다. 첸은 칭화대학교에서 전기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일했다. 그는 에베레스트(8848m)에 오르기도 했다.

탈레반들은 지역 경찰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일각에서는 파키스탄 군복을 입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들은 낭가파르바트로 향하는 마지막 마을에서 이틀에 걸쳐 걸으면서 접근했다. 그리고 칠흑 속에 디아미르 베이스캠프를 급습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인’을 찾았다.

첸은 텐트에서 나오면서 격렬히 저항했다. 첸이 군에서 터득한 특공무술을 펼치자 당황한 무장괴한이 총을 난사했다. 첸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 무장괴한들은 계획이 틀어졌다. 학살이 시작됐다.

김미곤 대장 등 10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낭가파르바트 원정대가 2018년 7월 낭가파르바트를 등반하고 있다. 김미곤 대장은 이 등반으로 우리나라 여섯 번째 8000m급 14개 봉우리 완등자가 됐다. 사진=한국도로공사

김미곤 대장 등 10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낭가파르바트 원정대가 2018년 7월 낭가파르바트를 등반하고 있다. 김미곤 대장은 이 등반으로 우리나라 여섯 번째 8000m급 14개 봉우리 완등자가 됐다. 사진=한국도로공사

괴한들은 칸이 영어를 쓸 수 있는 걸 알아챘다. 그들은 칸을 통해 모든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돈을 숨기다 적발되면 바로 사살하겠다고 했다.

괴한들은 곧이어 위성전화와 무전기를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수거된 위성전화와 무전기는 곧바로 파괴됐다. 괴한들은 등반대원들의 손을 묶고 무릎을 꿇게 했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저도 무슬림입니다.”
칸을 비롯한 3명의 훈자(인도 대륙 북부 잠무카슈미르 주 북서부 파키스탄 관할지역에 있는 도시)출신들이 괴한들에게 간청했다. 괴한들은 이들을 풀어줬다.

“고개 숙이고 절대 쳐다보지 마.”
그러면서 괴한들은 외국인들에게는 고개를 돌리라고 했다. 몇 명이 소리쳤다. “우린 미국인이 아니오.” 소용이 없었다. 드르르, 드르르, 드르르…. 연속해서 총성이 울렸다. 낭가파르바트를 오를 꿈에 부풀었던 11명이 쓰러졌다.

필사의 도주…총알이 귀를 스쳤다 

중국의 쟝징촨(張景川)은 괴한들이 무릎을 꿇리고 총부리를 겨누자 필사적으로 현장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했다. 그에게 날아온 총알은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지그재그로 뛰며 뒤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피했다. 1시간 뒤 베이스캠프로 돌아가 자신의 위성전화로 구조를 요청했다. 그는 날을 세운 아이스바일(얼음을 찍는 도끼 모양의 장비)을 찾아 손에 거머쥔 뒤 베이스캠프에서 벗어나 파키스탄 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칸은 괴한들이 잠시 자리를 옮긴 사이 온 텐트를 돌아다니며 혹시 남아 있는 무전기가 있는지 살폈다. 2개를 찾았다. 캠프2(6100m)의 동료들에게 연락했다. 응답이 없었다. 캠프2까지는 가야 안전할 텐데. 하지만 텐트 안에서 자다가 끌려나왔기에 장비가 취약했다. 그들은 300미터를 올라가 서로 껴안고 아침까지 버텼다.

한편 알렉산드라 드지크를 비롯한 다른 30여 명의 등반대원들은 낭가파르바트 캠프2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사고 소식을 알게 된 건 23일 오전 6시경. 칸이 이른 아침에야 캠프2에 있던 파키스탄 동료와 무전기로 연락이 닿았고 하얏트는 드지크에게 상황을 알려줬다. 구조 요청을 했다. 파키스탄 군대는 이미 쟝징촨의 연락을 받고 출동 중이었다.

캠프2가 술렁였다. 모든 원정대가 무전기를 들고 베이스캠프의 동료들을 불러냈다. 응답은 없었다. 드지크는 베이스캠프로 내려가기로 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 마침 파키스탄군이 도착했다.

현장은 참혹했다. 피가 곳곳에 묻어났다. 총탄에 구멍 난 보온의류에서 나온 거위털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3명, 슬로바키아 2명, 중국 2명, 중국계 미국인 1명, 리투아니아 1명, 네팔 1명, 파키스탄 1명이 숨졌다. 마을에서 탈레반에게 끌려온 가이드 2명 중 1명도 사살됐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하지 않다.
파키스탄 정부는 곧바로 유감 표명을 했다. 중국·우크라이나·리투아니아 등 희생자를 낸 국가들은 파키스탄에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당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테러에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길에는 히말라야에서 산화한 이들을 기리는 추모탑들이 있다. 이 탑에는 낭가파르바트에서 무장괴한에 희생된 중국인들이 새겨져 있다. 히말라야=김홍준 기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길에는 히말라야에서 산화한 이들을 기리는 추모탑들이 있다. 이 탑에는 낭가파르바트에서 무장괴한에 희생된 중국인들이 새겨져 있다. 히말라야=김홍준 기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길에는 히말라야에서 산화한 이들을 기리는 추모탑들이 있다. 이 탑에는 낭가파르바트에서 무장괴한에 희생된 중국인들이 새겨져 있다. 히말라야=김홍준 기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길에는 히말라야에서 산화한 이들을 기리는 추모탑들이 있다. 이 탑에는 낭가파르바트에서 무장괴한에 희생된 중국인들이 새겨져 있다. 히말라야=김홍준 기자

파키스탄은 이슬람 수니파가 77%다. 시아파는 20% 정도로 소수다. 수니파가 시아파를 겨냥한 테러가 잦다. 지난 달만해도 발루치스탄 주의 시장에서 수니파 소행으로 의심되는 폭탄테러로 최소 16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 발루치스탄은 파키스탄 탈레반(TTP)과 이슬람국가(IS) 세력의 활동이 잦다. 외교부는 이곳을 특별여행경보 2단계 ‘즉시 대피’ 지역으로 지정하고 있다.

TTP는 낭가파르바트 사건이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드론 공격에 사망한 부사령관에 대한 보복이라고 했다. 탈레반은 사건 현장에서 “사망한 오사마 빈라덴의 앙갚음”이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몸 상태 안 좋아 베이스캠프로 내려갔지만…

무장괴한에게 풀려나 목숨을 건진 파키스탄의 셰르 칸과 동료 2명은 시아파였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요리사(쿡)인 파키스탄의 알리 후세인은 시아파인 이유로 사살 됐다.

한 슬로바키아 등반가는 고소뇌부종 증세로 2명의 동료와 캠프2에서 베이스캠프로 내려섰지만 다른 큰 위험과 맞닥뜨렸고 3명 모두 그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파키스탄 당국이 2013년 6월 낭가파르바트에서 희생된 등반가들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중앙포토

파키스탄 당국이 2013년 6월 낭가파르바트에서 희생된 등반가들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중앙포토

등반가들이 테러의 표적이 된 적은 극히 드물다. 2000년 미국의 등반가 토미 칼드웰(41)과 그의 동료 3명이 키르기스탄 힌두쿠시에서 이슬람 세력에게 납치된 적이 있다. 이들은 3일 만에 탈출했다. 1995년에는 카슈미르에서 6명의 관광객들이 이슬람 무장세력에게 납치됐다. 미국인 한 명은 탈출했지만 노르웨이인 한 명은 참수당한 채 발견됐다. 나머지 4명의 생사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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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가파르바트의 비극으로 지역경제도 곤두박질쳤다. 1980년대와 90년대 한해 150여 개의 원정대가 다녀간 이 곳은 2011년 9·11 사태 직후 70여 개로 줄었다. 사건 직후 2014년에는 원정대가 40개에 미치지 못했다. 원정대 셰르파·포터로 일하며 수입을 올리는 지역 주민들은 당장 일감이 급감했다.

의문에 의문…용의자 검거 3년 넘게 걸려 

낭가파르바트 비극은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미국의 산악 작가인 데이비드 로버츠는 “미국인을 납치 계획을 세운 탈레반이 미국인을 사살했다는 점, 탈레반이 미국의 공격에 대한 보복이라며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는 물론 외모에서 서양인과 구분되는 중국인까지 사살한 점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당시 중국과 파키스탄은 근처에 댐 건설을 추진했는데 이에 대한 반감으로 중국인을 사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김미곤 대장은 “현지 주민 일부는 낭가파르바트의 비극을 단순 강도로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용의자 검거는 2016년까지 이어졌다. 20여 명을 잡아들였다. 낭가파르바트 근처의 마을에서다. 2013년 8월에는 용의자 검거 과정에서 탈레반의 공격을 받은 군인·경찰 3명이 숨지기도 했다.
2015년 2월에는 길기트의 감옥에서 이 테러로 재판을 앞둔 테러범 2명이 탈옥, 1명은 사살됐지만 다른 한 명은 끝내 검거하지 못했다.

낭가파르바트의 비극 이후 베이스캠프에는 무장 경찰이 상주해 있다. 2000년 파키스탄 출신으로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파키스탄의 영웅’ 나자르 사비르는 “낭가파르바트의 비극은 등반가들에게 9·11 테러였다”고 밝혔다.
히말라야=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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