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노, 아킬레! 어디 있는 거야!” 발터 보나티는 절규했다. “당신들 정말!”
■ 발터 보나티 #1954년 K2 초등한 이탈리아 원정대의 24세 최연소 대원 #산소통 전달하려 등정조 찾았지만 8100m서 죽음의 비박 #"나 대신 정상 갈까봐 텐트에 안 불렀다" 50년 뒤의 고백
보나티는 버려졌다. 그는 피켈로 눈을 파내고 죽음의 비박(biwak·독일어로 '노숙·한뎃잠' 의미)을 감행했다. 1954년 7월 30일, K2 8100m 지점에서였다. 이튿날, 리노와 아킬레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K2에 올랐다.
# 2018년의 K2 - 폴란드, 첫 동계 등반 노렸지만…
“폭설과 강풍으로 인해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있다. 데니스 우룹코는 팀을 떠났다.” - 2018년 2월28일 폴란드 등반대장 크르지스토프 비엘리치 페이스북
8000m가 넘는 14개 고봉에 깃발이 꽂혔다. 겨울에도 정상을 내줬다. 단 한 곳만 빼고. 바로 K2다. 2018년 3월 현재, 폴란드 원정대가 그 마지막 과제에 도전하고 있었다. 폴란드는 동계등반의 절대 강국이다. 겨울에 사람의 발길을 허용한 13개의 8000m급 봉우리 중 열 곳이 폴란드 차지(한 곳은 이탈리아와 동반 등정)였다.
K2(8611m)는 에베레스트(8848m)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에베레스트에는 4500명 넘게 올랐다. K2는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306명뿐(2017년 기준)이다. 등반 중 84명이 죽었다. 대부분 하산 중 사망했다. 태풍에 맞먹는 바람, 사면을 휘감는 제트기류는 공포다. 8500m 부근에서는 영하 30도를 밑돈다. 낮은 짧다. 바닥이 코에 박힐 것 같을 정도로 가파르다. K2 동계등정 도전은 1987, 2002, 2012년에 있었다. 모두 폴란드 원정대였고 모두 다른 루트였다. 이번엔 2년의 준비기간을 거쳤다. 기상예보관, 트레이너, 의사 그리고 식이요법 전문가까지 따라붙었다. 가압실에서 고소˙저산소 적응훈련을 거쳤다.
“안전이 등반의 최우선 순위다.” - 3월 5일 크리지스토프 비엘리치.
폴란드 원정대는 다시 K2 동계 등반을 접었다. 원정대는 190km 떨어진 낭가파르바트(8126m)에서 여성 산악인을 구조했다. 시간이 지체됐다. 하지만 사람이 먼저였다. 동계 등반의 시한이 2월까지인지, 3월까지인지를 놓고 팀 내분도 있었다. 무엇보다, 겨울의 K2는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K2는 그런 산이다.
# 1954년의 K2 - 패전국 이탈리아의 초등 야망
이탈리아는 1954년의 기회를 놓치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었다. 당시 파키스탄은 1년에 한 곳의 원정대만 받아들였다. 1939년과 1953년 연거푸 등정에 실패한 미국 원정대가 1955년을 예약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로서는 K2 초등의 기회를 뺏길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소위 ‘제국’들은 히말라야로 몰리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패전국이었다. '총통(Duce)' 베니토 무솔리니는 몸을 피하다 유격대의 총탄에 맞고 죽었다. 시체는 밀라노 광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위정자들은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사기를 북돋아줘야 했다. K2에 도전했다.
무솔리니처럼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원정대장을 뽑았다. 군 경력이 있는 지질학 교수 아르디토 데지오(1897~2001)였다. ‘작은 총통’이라 불렸다. 가혹했다. 이탈리아 원정 대원들은 후에 "데지오로부터 굴욕적인 취급을 받았다"고 했다. 데지오는 베이스캠프에서 전진 캠프에 보내는 문서에 “복종하지 않으면 각오하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언론의 희생물이 될 줄 알아”라는 내용을 적어 보내기도 했다. 데지오는 12명의 대원을 추렸다.
아킬레 콤파뇨니(1914~2009)는 데지오의 수제자였다. 이탈리아에서 스키 선수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리노 라체델리(1925~2009)는 속공 등반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1951년 발터 보나티가 나흘에 걸쳐 초등한 몽블랑의 그랑 카퓌생을 몇 주 뒤 18시간 만에 올랐다. 하지만 1953년 프랑스팀은 라체델리가 정상에 남겼다는 ‘증거물’을 발견하지 못해 등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발터 보나티(1930~2011)는 K2 원정대에서 가장 어렸다. 24세였다. 보나티는 이미 그랑 카퓌생을 비롯한 까다로운 봉우리들을 올라 검증이 됐으며 앞으로의 가능성도 인정받고 있었다.
# 1954년 7월 30일과 7월 31일 - 이틀에 걸친 미스터리
보나티는 최상의 컨디션에도 정상 등정조에서 빠졌다. 등정조인 콤파뇨니와 라체델리가 캠프8에 진을 쳤다. 보나티는 7627m의 캠프8에서 7345m의 캠프7로 내려갔다. 정상 등정조를 위한 산소통을 메고 8100m의 캠프9로 향했다. 7월 30일, 훈자(파키스탄의 소수민족) 마디와 원정대 동료 에리히 아브람과 함께였다. 아브람은 캠프9를 앞두고 탈진했다. 캠프8로 돌아갔다.
캠프9는 약속한 곳에 없었다. 보나티는 콤파뇨니와 라체델리를 불렀다.
"어디 있는 거야. 대답해!"
반응이 없었다. 해가 지려는 참이었다. 계속 불렀다. 전등은 얼어서 켜지지 않았다. 사탕을 먹으려는데, 몸에 수분이 없어 침이 안 나와 뱉어 버렸다. 마디는 탈진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비박을 결심했다. 피켈로 눈을 파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콤파뇨니와 라체델리를 몇 번 더 불렀다. 갑자기, 불빛이 보였다.
캠프9는 생각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당초 약속한 지점에서 180m나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가파른 사면을 횡단해야 했다. 보나티는 후에 『내 생애의 산들(Berge meines Lebens)』에서 당시의 대화를 이렇게 적었다.
"산소통을 가지고 왔나?"
"그래."
"놔두고 가라."
"뭐라고?" 마디 상태가 안 좋다."
마디는 벌떡 일어나더니 텐트 쪽으로 달려갔다. 위험했다. 보나티가 붙들었다. 텐트 쪽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보나티는 피켈로 다시 눈을 파내고 땅을 다졌다. 8100m에서 비박에 들어갔다.
마디는 정신이 혼미했다. 보나티는 후일 인터뷰에서 “그때, 마디가 어디 가지 않도록 지켜줘야 했다”며 “마디는 자신의 크램폰(아이젠)을 스스로 벗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 손가락이 온전히 붙어 있는지 계속 손을 지켜봤고, 정신이 제대로인지 계속 무엇인가를 떠올려야 했다”고 말했다. 보나티는 눈에 피눈물이 맺혔다.
7월 31일.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났다. 마디는 햇빛이 한줄기 비칠 때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1년 전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불이 낭가파르바트를 초등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이 불굴의 훈자는 자신의 모든 발가락을 K2에 바쳤다. 그리고 거의 모든 손가락도 잃었다. 이후론 산에 들지 못했다. 데지오는 13명의 훈자들에게 방한 부츠를 지급하지 않았다. 보나티는 탈이 없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콤파뇨니와 라체델리는 보나티와 마디가 놔두고 간 산소통을 업고 K2 정상에 올랐다. 이탈리아 원정대원들은 2년간 원정에 관한 일들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한 상태였다.
#의문, 그리고 또 의문 - 산소통은 왜 일찍 바닥났나
①데지오는 1955년에 낸 등정 보고서 『K2, 위대한 승리(Victory over K2)』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콤파뇨니와 라체델리는 보나티와 마디가 비박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침에 텐트에서 나와 마디가 황급히 내려가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엄청난 바람에 보나티가 외치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②데지오의 책에는 의문의 사진이 있다.
콤파뇨니와 라체델리는 보나티가 놔두고 간 실린더의 산소가 빨리 소진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나티를 공격했다. 보나티가 비박 중에 산소를 썼으며 그 결과로 자신은 체감 영하 50도에서도 한 곳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
콤파뇨니와 라체델리는 이미 바닥이 난 무거운 산소통을, 그것도 3개씩이나 메고 정상에 올랐다. 데지오의『K2, 위대한 승리』에는 콤파뇨니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라체델리는 방금 산소마스크를 뗀 듯 입 주위에 성에가 낀 채로 찍힌 사진이 있다. 과연 산소가 모두 떨어진 상태로 정상에 올랐을까. 이 둘은 “산소통을 내려놓을 상황이 아니었다. 사면이 너무 가팔라서, 산소통을 내려놓으면서 균형을 잃고 추락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③보나티는 과연 비박 중에 산소를 써버렸나
보나티는 “산소를 흡입할 장비가 없었다”고 했다. 마스크와 튜브가 수중에 없었다는 것. 그 장비는 콤파뇨니와 라체델리가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콤파뇨니와 라체델리는 정상을 찍고, 캠프9를 거쳐 보나티와 마디, 그리고 아브람이 기다리고 있는 캠프8의 텐트 안으로 쓰러지듯 들어갔다. 보나티는 『내 생애의 산들』에서 이렇게 적었다. “7월 31일 밤 11시, 5개의 심장이 하나같이 승리에 들떠 요동치고 있었다. 그 순간만은, 다른 일들은 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보나티는 그들의 사죄를 기다렸다. 그러나 전혀 다른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4년 7월, 이탈리아의 K2 초등 10주년이었다. ‘보나티는 정상에 올라서려고 콤파뇨니와 라체델리의 산소를 훔쳤다’는 내용의 기사가 게재됐다. 이 기사에는 보나티가 '파키스탄의 첫 K2 등정자'라는 미끼로 마디를 회유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보나티는 명예훼손이라며 법적 대응을 했다. 승소했지만, 이 모든 기사의 뒤에는 콤파뇨니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콤파뇨니가 기사의 제보자(source)였다.
#의문, 그리고 또 의문 - 캠프9는 왜 약속된 장소에 없었나
④콤파뇨니와 라체델리는 왜 캠프9를 옮겼나
보나티의 비박과 관련한 ‘K2 미스터리’에 대해, 라체델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동안 보나티를 향한 압박은 데지오와 콤파뇨니를 중심으로 가해졌다. 라체델리는 K2 등정 50년 뒤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보나티는 산소마스크도, 산소통 조절장치도 없었다.” 보나티가 비박 중에 산소를 흡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와 콤파뇨니는 (독일산) 산소통을 적절히 조절할 수 없었다. 산소가 과도하게 분출됐다. 그래서 산소가 일찍 소진됐다”고 말했다. 라체델리는 2004년 펴낸 『K2 : 정복의 대가(K2: The Price of Conquest)』에 이렇게 적었다. ‘보나티는 산소를 쓸 수 없었다. 산소마스크는 우리에게 있었다 … 보나티가 정상에 도전할까 봐 캠프9를 옮겼다.’ 그는 또 ‘데지오의 책은 콤파뇨니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썼다.
라체델리의 동료들은 “라체델리는 보나티처럼 따돌림을 당할 게 두려워 50년간 입을 닫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해 5월, 이탈리아 알파인 클럽은 데지오의 『K2, 위대한 승리』는 원정대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책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보나티는 1955년에 샤모니의 드류 단독등반이란 업적을 이뤘다. K2에서의 쓰라린 경험이 단독 등반의 동기가 됐다. 1956년에는 K2 무산소 단독등반을 계획했다. 지원이 없어 포기했다. 1958년에는 가셔브룸4를, 1963년 겨울에는 그랑조랑스 북벽을, 1965년 겨울에는 단독으로 마터호른 북벽을 등반했다.그리고 등반계에서 은퇴했다. 35살이었다. 기자가 됐고 등반보다는 오지 탐험에 매진했다.
2004년, 보나티는 K2 등반 50주년 행사에 빠졌다. 그는 “50주년을 축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K2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나티는 『내 생애의 산들』에 이렇게 썼다. ‘K2 등반 전까지,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54년 이후로 그런 믿음이 사라졌다. 나 자신만을 믿게 됐다.’ 그는 또 ‘남을 기대하지 않는 것, 무엇이든 혼자 결정하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 무슨 일이든 자기 기준으로 잴 것, 실수는 대가를 치른다는 것. K2 원정 이후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보나티는 2011년 암으로 사망했다. 세계 처음으로 14좌에 모두 오른 라인홀트 매스너는 "천재적이고 비범한 자연 애호가가 떠났다"며 등반의 황금기를 이끈 보나티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유명한 배우였던 아내 로사나 포데스타는 보나티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병원 측에서 출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k2의 눈처럼 흰 침대 위의 보나티. 그는 마지막에 K2가 생각 났을까.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