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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등산사] "안나푸르나 초등 대원들, 현지 소녀·소년들과 부적절 행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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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호 면

프랑스의 모리스 에르조그와 루이 라슈날은 세계 첫 8000m급 등정에 성공했다. 1950년 6월 3일, 세계에서 열 번째로 높은 안나푸르나(8091m)를 단 6일 만에 한번의 시도로 올랐다. 당초 원정대장 에르조그는 리더십과 등반 능력을 의심 받았다. 친구인 프랑스 알파인 클럽 협회장 루시앙 데비는 라슈날, 가스통 레뷔파, 리오넬 테레이 등 다른 대원들에게 복종 선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전 정보가 없었던 프랑스 원정대는 히말라야에서 루트 정찰에  2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그새 몬순이 다가왔다. 에르조그는 결단을 내렸다. 산세가 험해 보이는 다울라기리(8167m)를 포기하고 안나푸르나를 택했다. 에르조그는 정상에서 스폰서와 특정 언론에 건네줄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1시간이 흐르자 라슈날은 에르조그에게 “미쳤다”고 했다. 하산 길은 험난했다. 에르조그는 장갑을 잃어버렸다. 라슈날은 길을 잃었다. <이상 전편 요약. 전편 기사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261302>

1950년 안나푸르나 등정 중 손가락과 발가락에 동상이 걸린 모리스 에르조그를 셰르파가 업어서 하산시키고 있다. [중앙포토]

1950년 안나푸르나 등정 중 손가락과 발가락에 동상이 걸린 모리스 에르조그를 셰르파가 업어서 하산시키고 있다. [중앙포토]

정상 노리던 에르조그·라슈날, 흥분제 먹고 올라

에르조그·라슈날과 다른 조로, 역시 안나푸르나 정상을 노렸던 레뷔파와 테레이는 캠프5에 있었다. 그들은 에르조그가 동상에 걸려 나무토막처럼 된 손을 들어보이자 경악했다.
“라슈날은?”
“올 거야.”
에르조그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대답했다. 에르조그와 라슈날은 흥분제인 맥시톤(maxiton)을 등반 직전에 복용했다.

■ 1950년 프랑스 원정대<하> #정상 오른 에르조그·라슈날 동상 걸리고 #레뷔파·테레이는 설맹…지옥 같은 하산 #40여일 지나서야 귀국, 공항에 환영 인파 #정상 사진 '주인공' 에르조그 국민영웅으로 #1년 뒤『안나푸르나』출간…1500만부 팔려 #다른 대원들 자서전서 "성행위" "나치 같았다" #말년의 에르조그 의혹 떠오르자 궁지 몰려

에르조그보다 먼저 정상에서 내려선 라슈날은 뒤처졌다. 눈보라 때문에 앞을 가릴 수 없었다. 미끄러졌다. 피켈과 크램폰이 사라졌다.
“도와줘~!”
라슈날의 목소리가 텐트 밖에서 들렸다. 테레이가 기어나가 라슈날을 찾아냈다. 레뷔파와 테레이는 정상 도전을 포기하고 에르조그와 라슈날을 보살폈다. 그들의 얼어버린 손과 발을 주물러 줬다. 현재의 의학 상식으로서는 하지 말아야할 행동이었다.

이튿날 그들 네 명은 텐트 없이 침낭 하나만 들고 하산에 나섰다. 물 한 방울, 빵 부스러기도 없었다. 갑자기 라슈날이 크레바스에 빠졌다. 그건 되레 행운이었다. 눈보라를 피할 수 있었다.

레뷔파가 다음날 크레바스에서 머리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눈보라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여.”
그런데 라슈날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날씨 좋네, 날씨 좋아.”
레뷔파는 자신이 설맹에 걸려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보인 것이었다. 테레이도 설맹에 걸린 상태였다. 설맹에 동상, 그리고 극심한 피로. 성한 사람이 없었다. 도와 달라, 살려달라고 외쳤다. 누가 들었을까. 캠프4A에서 다른 대원인 샤를 자츠가 나와 그들 네 명을 이끌어줬다.

1950년 안나푸르나 등정 중 텐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루이 라슈날(왼쪽)과 리오넬 테레이. [중앙포토]

1950년 안나푸르나 등정 중 텐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루이 라슈날(왼쪽)과 리오넬 테레이. [중앙포토]

1950년 6월 설맹에 걸린 리오넬 테레이를 셰르파들이 부축하며 안나푸르나에서 하산시키고 있다. [중앙포토]

1950년 6월 설맹에 걸린 리오넬 테레이를 셰르파들이 부축하며 안나푸르나에서 하산시키고 있다. [중앙포토]

지옥의 하산…노상에서 동상 걸린 손·발가락 잘라

하산 중 캠프4를 지나자 눈사태가 덮쳤다. 함께 로프를 묶고 이동하던 에르조그와 셰르파들은 150m나 쓸려 내려갔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캠프2. 셰르파 두 명이 발 떼기조차 힘든 테레이의 양쪽 겨드랑이를 부축하고 걸음마 시키듯 내려가게 했다. 에르조그와 라슈날도 더 이상 걸을 수 없자 팀 닥터인 자크 우도는 그들의 대퇴부와 동맥에 마취 주사를 맞혔다. 이 처방은 당시 걸을 수 있게 하는데 효과적이라고 여겨졌다.

6월 7일, 에르조그·라슈날·레뷔파는 들것에 실려 내려갔다. 몬순이 닥치면 바로 재앙이었다. 6월 8일 캠프1. 정상 등정 5일 뒤에야 원정대는 ‘안나푸르나 등정 성공’이란 내용의 무전을 프랑스에 보낼 연락책을 보냈다.

침낭으로 동상에 걸린 발을 감싼 모리스 에르조그가 1950년 6월 안나푸르나에서 하산하고 있다. [중앙포토]

침낭으로 동상에 걸린 발을 감싼 모리스 에르조그가 1950년 6월 안나푸르나에서 하산하고 있다. [중앙포토]

베이스캠프까지는 들것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울퉁불퉁한 길이 이어져 셰르파들이 ‘환자’들을 업고 내려갔다. 6월 9일, 포터 수십 명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베이스캠프에 대기하고 있었다.

6월 10일, 몬순이 시작됐다. 에르조그는 열병에 걸렸다. 그는 후일 『안나푸르나』에 “나는 그때 살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다”고 적었다. 에르조그와 라슈날의 손·발가락이 급속히 썩어 들어갔다. 우도는 노상에서 그들의 손·발가락을 잘라냈다. 인도 고락푸르의 기차역에서도 손가락을 잘라내다가 그 중 일부가 플랫폼에 떨어져 현지인들이 경악했다.

라슈날은 모든 발가락이, 에르조그는 모든 손가락과 발가락이 사라졌다. 이 장면은 ‘트웬티 타이니 핑거스(twenty tiny fingers)’라는 노래의 모티브가 됐다. 원정대는 7월 6일에야 인도 델리에 도착했다.

1950년 6월 3일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른 뒤 7월 17일에야 프랑스로 귀국한 모리스 에르조그. 그는 동상으로 모든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었다. [중앙포토]

1950년 6월 3일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른 뒤 7월 17일에야 프랑스로 귀국한 모리스 에르조그. 그는 동상으로 모든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었다. [중앙포토]

1950년 6월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른 뒤 40여 일이 지나서야 프랑스로 돌아온 루이 라슈날. 그는 동상으로 모든 발가락을 잃었다. [중앙포토]

1950년 6월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른 뒤 40여 일이 지나서야 프랑스로 돌아온 루이 라슈날. 그는 동상으로 모든 발가락을 잃었다. [중앙포토]

에르조그, 『안나푸르나』1500만부 팔렸어도 한푼 못 벌어

그들이 파리에 도착한 것은 정상 등정 뒤 한 달 하고도 14일이 지난 7월 17일이었다. 공항에는 환영 인파가 몰렸다. 프랑스 원정대에 관한 독점 기사 게재 계약을 한 파리스매치는 에르조그가 프랑스 국기 ‘트리컬러’를 피켈에 걸고 안나푸르나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파리스매치는 1951년 2월에도 원정대 기사를 실었다. 에르조그를 ‘국민영웅’이라 칭하면서도, 라슈날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에르조그는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으며 『안나푸르나』 집필에 들어갔다. 『안나푸르나』 서문에 자신이 밝혔듯, 그가 책을 쓴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듬해 출간된 이 책에는 프랑스 원정대의 팀워크, 희생, 불굴의 의지 그리고 정상에 오른 뒤의 벅찬 감정이 곳곳에 녹아들었다.

프랑스 원정대 귀국 직후 파리스 매치가 1면에 실은 모리스 에르조그의 안나푸르나 등정 확인 사진. 루이 라슈날이 찍어줬다. [중앙포토]

프랑스 원정대 귀국 직후 파리스 매치가 1면에 실은 모리스 에르조그의 안나푸르나 등정 확인 사진. 루이 라슈날이 찍어줬다. [중앙포토]

‘산은 우리의 생사를 내거는 자연스런 투우장이었으며 우리는 그 산에서 일용할 양식처럼 간절했던 자유를 얻었다…빈손으로 찾아간 안나푸르나는 우리가 평생 간직하고 살아갈 보배인 것이다 …우리에겐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독자들은 『안나푸르나』에 빠져들었다.

『안나푸르나』는 산악 관련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60년간 1500만 부 넘게 팔렸다. 그러나 정작 에르조그는 이 책으로 직접 번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원정 비용을 대준 프랑스 히말라야위원회가 『안나푸르나』의 판권을 갖기로 에르조그와 계약했기 때문이다. 원정대에는 또 다른 계약이 있었다. 다른 대원들은 등정 후 5년간 어떤 출판물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계약기간’ 5년이 지나자 라슈날은 자신의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자서전을 내기로 했다. 라슈날은 이 자서전이 출간되기 바로 전해인 1955년 샤모니에서 스키를 타던 중 크레바스에 빠져 숨졌다.

라슈날의 자서전은 결국 에르조그가 편집했다. 앞서 원정대원들로 하여금 에르조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한 프랑스 알파인 클럽의 루시앙 데비 회장도 편집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민감한, 즉 원정대 내의 불화, 이견이 드러나는 부분은 빠졌다고 미국 작가 데이비드 로버츠는 밝혔다. 로버츠는 “멸균되고 삭제된 눈가림”이었다고 표현했다.

1996년, 에르조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레뷔파의 자서전이 나왔다. 레뷔파가 숨진 뒤 그의 아내가 자료를 모은 것이다. 라슈넬의 일기도 같은 해 책으로 출간됐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의혹’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50년 4월 1일 촬영한 프랑스 원정대 사진. 맨 왼쪽이 루이 라슈날, 그 옆 앉은 사람이 가스통 레뷔파, 가운데 러닝셔츠 차림 왼쪽이 리오넬 테레이, 오른쪽이 모리스 에르조그. [중앙포토]

1950년 4월 1일 촬영한 프랑스 원정대 사진. 맨 왼쪽이 루이 라슈날, 그 옆 앉은 사람이 가스통 레뷔파, 가운데 러닝셔츠 차림 왼쪽이 리오넬 테레이, 오른쪽이 모리스 에르조그. [중앙포토]

1950년 프랑스의 히말라야 원정대장인 모리스 에르조그가 네팔에서 현지 소녀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다. [중앙포토]

1950년 프랑스의 히말라야 원정대장인 모리스 에르조그가 네팔에서 현지 소녀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다. [중앙포토]

레뷔파는 자서전에서 “에르조그에 대한 충성 맹세는  독일의 나치 같은 짓”이라고 표현했다.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를 최종 루트는 자신이 발견했음에도 에르조그가 그것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것, 1951년에 안나푸르나 등정에 관한 책을 집필하려다가 히말라야 위원회의 한 인사로부터 국립 알파인스키학교에서의 직업을 잃을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는 내용도 적었다.

라슈날의 1996년 책은 1956년판의 무삭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나온다. 원정대가 현지에서 성욕을 해결할 목적으로 현지 소녀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소녀들이 없으면 소년들로 대신했다고 한다. 원정대가 지옥 같은 귀환 중에 셰르파가 강으로 추락해 숨진 것을 숨겼다고 밝혔다. 와인 한 병을 따는 대신 닭고기와 감자가 저녁 식단에서 사라졌다는 내용도 있다.

리오넬 테레이가 1950년 5월 안나푸르나에서 등반에 나서고 있다. [중앙포토]

리오넬 테레이가 1950년 5월 안나푸르나에서 등반에 나서고 있다. [중앙포토]

"에르조그, 의혹에도 8000m급 첫 등정 리더십 빛나"

1998년 에르조그는 회고록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글을 쓰면 병세 호전에 도움이 된다’는 간호사의 조언으로 『안나푸르나』를 집필했다고 한다. 이 조언을 듣기 전에는 책을 쓸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원정대원 중 한 명을 탈락시킬 수 있다고 위원회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다고도 썼다. 항간에는 그 대상이 라슈날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비공식적으로도 우리 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이들은 없었다.’ 에르조그는 『안나푸르나』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하지만 왜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한 주장들이 튀어나왔을까.

트루 서밋』을 쓴 데이비드 로버츠는 에르조그가 상업적이고 이기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가  『안나푸르나』를 스스로 평가해 달라고 하자, 에르조그는 “그건 소설이지, 진정한 소설”이라고 답했다. 에르조그가 말한 ‘소설’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에르조그의 딸 펠리시테는 “아버지는 역사를 바꾼 허풍쟁이였다”며 “세상이 그를 너무 좋게 봐줬기 때문에 주변사람을 배신하고 무시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고 말했다.

2005년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꼭대기에 오른 모리스 에르조그. 이때 에르조그는 86세였다.[중앙포토]

2005년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꼭대기에 오른 모리스 에르조그. 이때 에르조그는 86세였다.[중앙포토]

하지만 에르조그는 과보다 공이 두드러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김동수 대학산악연맹 부회장은 “1950년 프랑스 원정대에서 에르조그는 국가의 명예를 우선시 하면서 라슈날·레뷔파·테레이와 갈등이 있었던 것로 보인다”며 “그러나 에르조그가 리더십 논란을 털어버리고 이들 걸출한 산악가이드들과 힘을 합쳐 최초의 8000m급 등반을 산소 없이, 단 한 번의 시도로 성공한 건 등반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라고 말했다. 실제 프랑스 원정대의 안나푸르나 초등 뒤 8000m급 고봉들의 정상에는 각국의 깃발이 잇달아 꽂혔다.

산악도서 전문 출판사인 하루재클럽의 변기태 대표는 “에르조그의 『안나푸르나』와 라슈날의 일기, 레뷔파의 자서전은 당시 안나푸르나 정상 등정 상황에 대한 묘사가 달라 이들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어느 원정대나 대원들의 관점이 미묘하게 다르기 마련이고 에르조그라는 거물이 관련됐기 때문에 관심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이라고 밝혔다.

원정대원 중 안나푸르나 초등 50주년, 60주년을 맞이한 이는 에르조그가 유일했다. 라슈날은 1955년에 스키를 타다가 숨졌다. 테레이는 1965년 등반 중 추락사했다. 레뷔파는 1985년에 남성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에르조그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의혹에 대해 무응대 혹은 반박으로 일관했고 2012년 12월 13일 9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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