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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등산사] 에베레스트서 75년 만에 찾은 남자…그 의문의 흔적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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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Obterras London-Mallory Irvine Nove Remainder Alcedo–Norton Rongbuk.’ 암호로 만들어진 한통의 전보가 티베트에서 영국으로 날아갔다. 1924년 6월 19일이었다. 에베레스트(8848m)를 오르던 조지 맬러리(1886~1924)와 앤드류 어빈(1902~1924)의 사망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 조지 맬러리 #1924년 동료 어빈과 함께 실종, 1999년에야 시신 발견 #사진기와 아내 사진은 사라졌고 고글은 멀쩡히 있었다 #앞머리엔 골프공만한 구멍…그날 대체 무슨 일 있었나

1922년 6월 7일에 찍은 영국의 에베레스트 2차 원정대. 조지 맬러리는 하워드 소머벨, 에드워드 노턴과 함께 에베레스트 8225m까지 올랐다. 조지 핀치와 지오프리 브루스는 산소통을 이용해 8321m까지 등반했다. 이 사진은 맬러리가 이끈 2차 원정대의 세 번째 등반팀이었다. 이 사진 촬영 직후 사진 속 상당수가 눈사태로 사망했다. 중앙포토

1922년 6월 7일에 찍은 영국의 에베레스트 2차 원정대. 조지 맬러리는 하워드 소머벨, 에드워드 노턴과 함께 에베레스트 8225m까지 올랐다. 조지 핀치와 지오프리 브루스는 산소통을 이용해 8321m까지 등반했다. 이 사진은 맬러리가 이끈 2차 원정대의 세 번째 등반팀이었다. 이 사진 촬영 직후 사진 속 상당수가 눈사태로 사망했다. 중앙포토

2차 에베레스트 원정서 7명을 죽게 한 죄책감

1922년이었다. 영국의 에베레스트 2차 원정대에 속한 맬러리는 심한 죄책감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자신의 판단착오로 에베레스트 노스 콜(North Col)에서 7명을 잃었다. 에베레스트 등반 사상 최초의 사망자들이었다. 그는 아내 루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니…내 실수요.”

조지 맬러리와 아내 루스. 둘은 1914년에 결혼했다. 루스는 1942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중앙포토

조지 맬러리와 아내 루스. 둘은 1914년에 결혼했다. 루스는 1942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중앙포토

맬러리는 예년보다 2주 앞서 온 몬순을 간과했다. 로프를 묶지 않았다. 대원들은 피로가 쌓였다. 맬러리는 우회로 대신 슬로프가 많은 직등을 택했다. 수분 가득한 눈은 허물어졌다. 눈사태가 일어났다. 맬러리도 눈사태에 휩쓸렸다가 ‘수영하듯’ 겨우 탈출했다. 전의를 상실한 원정대는 짐을 쌌다. 맬러리의 동료인 하워드 소머벨은 “왜 셰르파들만…우리 영국인도 죽었어야 했다”고 했다.

아내 루스와 3명의 아이들(딸·딸·아들)이 맬러리를 영국에서 기다렸다. 아울러, 실업도 기다리고 있었다. 맬러리는 원정을 앞두고 차터하우스 스쿨에서의 교사직을 관뒀다. 1923년 1월, 그는 미국으로 향했다. 에베레스트 원정 관련 순회강연을 위해서였다. 반응은 시큰둥했다.

1923년 3월 18일자 뉴욕타임스 . 조지 맬러리와의 인터뷰를 담았다. 중앙포토

1923년 3월 18일자 뉴욕타임스 . 조지 맬러리와의 인터뷰를 담았다. 중앙포토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일각선 조작한 발언이라 주장  

순회강연 일정 말미, 뉴욕타임스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기자가 물었다. “왜 에베레스트에 가나(Why do you want to climb Mount Everest)?” 맬러리는 짧게 대답했다. “거기 있기 때문(Because it’s there).” 뉴욕타임스 1923년 3월 18일자였다. 일각에선 맬러리가 실제로 이 말을 안 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기자가 맬러리의 인터뷰 내용을 손봤다며 논란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 즈음, 영국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가 꾸려진다는 소식이 맬러리에게 간간이 들려왔다.

웨이드 데이비스의 'into the silence' 표지에 쓴 사진. 1924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 대원들이다. 왼쪽 윗줄부터 오른쪽으로 앤드류 어빈, 조지 맬러리, 에드워드 테디 노턴, 노엘 오델, 존 맥도널드. 왼쪽 아랫줄부터 오른쪽으로 에드워드 셰브브어, 지오프리 브루스, 하워드 소머벨, 벤틀리 비담. 중앙포토.

웨이드 데이비스의 'into the silence' 표지에 쓴 사진. 1924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 대원들이다. 왼쪽 윗줄부터 오른쪽으로 앤드류 어빈, 조지 맬러리, 에드워드 테디 노턴, 노엘 오델, 존 맥도널드. 왼쪽 아랫줄부터 오른쪽으로 에드워드 셰브브어, 지오프리 브루스, 하워드 소머벨, 벤틀리 비담. 중앙포토.

영국은 다급했다. 북극점은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1909년 4월 6일)에게, 남극점은 노르웨이의 로알아문젠(1911년 12월 14일)에게 뺏겼다. 1차 대전 후의 국민 사기를 북돋아야 했다. 지구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에 매달렸다. 영국은 초모랑마를 측량한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아예 그 산에 붙이지 않았던가(1865년). 1921년의 1차 원정(접근로 파악을 위한 목적. 맬러리가 에베레스트 북동능선 루트를 찾아냈다), 1922년의 2차 원정(조지 핀치가 산소통을 쓰며 8321m까지 진출)에 이은 3차 원정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앤드류 어빙을 다룬 책 표지. 중앙포토

앤드류 어빙을 다룬 책 표지. 중앙포토

"맬러리와 어빈의 동성애설은 근거 없어"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 선발 기준은 까다로웠다. 학력, 군 경력, 가족상황이 두루 살펴졌다. 1차 대전 직후라 군 경력은 대중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였다. 순수 영국 출신 여부도 선발 과정에서 고려됐다. 앞선 2차 원정에서 산소통을 메고 에베레스트 8321m까지 오르는 기록을 세운 조지 핀치는 탈락했다. 호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에베레스트 위원회(Everest Committee)는 영국인이 세계 최고봉에 오르기를 원했다.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앤드류 어빈이 합류했다. 맬러리는 어빈을 등반 파트너로 꼽았다. 일각에서는 맬러리와 어빈 사이의 동성애 관계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맬러리는 헌식적인 아버지이자 남편이었고 어빈은 완전한 이성애자였다(『Into the silence』, Wade Davis. 478p).

1924년 6월 6일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에서 캠프4를 떠나는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 이들의 마지막 사진이었다. 중앙포토.

1924년 6월 6일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에서 캠프4를 떠나는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 이들의 마지막 사진이었다. 중앙포토.

세컨드 스텝 넘었다는데…갑자기 사라진 두 명

1924년 6월4일, 맬러리는 어빈과 함께 정상 공격에 나섰다. 3차 원정대의 세 번째 등정팀이었다. 6월8일, 지원조인 노엘 오델이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오델은 등반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오후 12시50분, 7925m 지점에 다다라서 처음으로 온전한 형태의 화석을 발견하고는 뛸 듯이 기뻤다. 갑자기 시계가 명료해졌다 … 능선의 바위구간 밑에 두 개의 점이 보였다. 하나의 점은 바위 돌출부위를 넘어 다른 하나의 점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야가 다시 흐려졌다. 오델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맬러리와 어빈은 정상  마지막 구간인 피라미드로 향하고 있었다.” 맬러리와 어빈은 미지의 세계로 사라졌다.

1924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가 고안한 연락 신호. 실종된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을 찾기 위해 침낭이나 담요를 이용했다. 이 사진처럼 십자, 혹은 T자 표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음. 희망이 없음. 지시를 기다림'을 뜻한다. 원정대 일원인 존 노엘이 촬영했다. 중앙포토

1924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가 고안한 연락 신호. 실종된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을 찾기 위해 침낭이나 담요를 이용했다. 이 사진처럼 십자, 혹은 T자 표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음. 희망이 없음. 지시를 기다림'을 뜻한다. 원정대 일원인 존 노엘이 촬영했다. 중앙포토

수색조가 올라갔다. 맬러리와 어빈이 마지막으로 보낸 캠프6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2시간 동안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지원조로 올라간 오델이 캠프6에 있던 침낭 두 개를 T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 의미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희망이 없다, 지시를 기다린다’였다. 그 아래 캠프는 다시 아래 캠프로 신호를 보냈다. 여섯 개의 담요를 ×로 만들었다. ‘죽음’을 의미했다. 아래에서 지시를 보냈다. 담요 세 개를 나란히 펼쳤다. ‘수색을 포기하라, 내려와라’는 뜻이었다. 그 위의 캠프는 다시 ‘알았다’는 의미로 펼쳐 놓았던 담요를 거둬들였다.

1924년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만든 침낭과 담요를 이용한 신호. 실종된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을 수색할 때 고안했다.

1924년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만든 침낭과 담요를 이용한 신호. 실종된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을 수색할 때 고안했다.

맬러리와 어빈이 사용했던 산소통 하나는 오델에 의해 퍼스트 스텝 아래에서 발견됐다. 어빈의 피켈은 1933년 영국의 4차 원정대에 의해 그 근처(8461m)에서 발견됐다. 1936년 영국 원정대의 프랭크 스미스는 어빈의 피켈 발견 지점 바로 아래에 있는 시신을 봤다고 했다. 그는 이 내용을 편지 형태로 남겼다. 그의 아들이 2013년에야 그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1979년에는 중국 등반가 왕홍바오가 "내가 1975년에 8100m 지점에서 영국인으로 보이는 시신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왕은 이 발언 다음날 눈사태로 사망해 '시신'이 있다는 정확한 지점을 알 수 없게 됐다.

1933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4차 원정대가 찾은 앤드류 어빈의 피켈. 퍼스트 스텝 바로 밑, 8461m 지점에서 발견됐다. 중앙포토

1933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4차 원정대가 찾은 앤드류 어빈의 피켈. 퍼스트 스텝 바로 밑, 8461m 지점에서 발견됐다. 중앙포토

미라 형태로 발견된 맬러리…그는 정상을 밟았나

1999년, 마침내 맬러리의 시신이 발견됐다. 에베레스트 북벽 8157m지점, 그러니까 어빈의 피켈을 발견한 지점 350m 아래쯤이었다. 맬러리의 시신을 발견한 등반가 콘라드 엔커는 그 시신의 등산복에 박힌 G. Leigh. Mallory라는 이름을 확인했고 런던의 한 등반장비 업체 상호가 적힌 영수증과 편지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에베레스트의 매몰찬 눈바람과 예리한 자외선을 버틴 지 75년 만이었다. 그러나 맬러리의 시신은 여전히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이 1924년에 등정한 루트. 점선은 추정 루트다.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이 1924년에 등정한 루트. 점선은 추정 루트다.

① 아내 사진은 어디에 : 시신에는 맬러리가 항상 간직하고 있었던 아내의 사진이 없었다. 맬러리가 에베레스트 등정 징표로 이 사진을 정상에 놓고 오지 않았을까.

② 맬러리의 멀쩡한 고글은 가슴의 주머니에 : 오델은 오후 1시경에 세컨드스텝을 지나는 맬러리와 어빈을 봤다고 했다. 맬러리가 고글을 사용하지 않은 채 사망했다면, 고글을 쓸 필요가 없는 일몰 직후에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시간이라면 정상을 찍고 내려왔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하지만 반론도 있다. 맬러리가 추락하면서 끼고 있던 고글이 날아갔고 품에서 나온 고글은 여분이었다는 것이다.

③ 앞머리의 구멍은 언제 어디서 : 골프공 크기의 두부 손상은 그의 직접 사인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피켈에 강하게 부딪힌 것으로 보이며, 하산을 빨리하기 위해 피켈로 속도와 방향 조절을 하며 눈 미끄럼을 타는 ‘글리세이딩’ 중에 부상을 입은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1999년 에베레스트에서 찾은 맬러리의 시신. 실종 75년 만이었다. 중앙포토

1999년 에베레스트에서 찾은 맬러리의 시신. 실종 75년 만이었다. 중앙포토

④ 오른다리 골절상 : 맬러리의 시신은 머리를 제외하고는 심각한 손상이 없었다. 오른쪽 부츠 바로 위의 정강이뼈와 비골이 부러졌다. 높은 곳에서 추락해 생긴 부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어빈의 피켈이 발견된 지점과 맬러리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은 350m 차이가 난다. 수직고도 100m다. 어빈이 피켈을 떨어뜨렸을 정도의 사고가 났고 맬러리도 그 순간에 떨어졌다면, 350m 넘게 추락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추락에 한쪽 다리만 부러지지 않는다. 맬러리가 추락했다고 해도 그 거리는 짧았다는 것이다.

⑤ 허리의 로프 자국 : 맬러리의 시신 허리 부분에는 로프에 강하게 쓸린 자국이 있다. 엄청난 충격으로 생긴 상처다. 어빈과 서로 로프를 묶고 등반을 하다가 둘 중 한 명이 추락해서 생긴 상처일 수도 있다.

에베레스트의 세컨드 스텝. 세컨드 스텝은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향하는 가장 까다로운 구간이다. 중앙포토

에베레스트의 세컨드 스텝. 세컨드 스텝은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향하는 가장 까다로운 구간이다. 중앙포토

⑥ 맬러리는 세컨드 스텝을 넘었을까 1 : 맬러리는 당시 5.9급의 등반 실력을 갖췄다. 현재의 등반가들이 1924년의 상황에 맞춰(산소통 없이, 현재 설치돼 있는 사다리를 제거하고) 세컨드 스텝의 난도를 가늠했다. 맬러리의 시신을 발견한 콘라드 엔커는 그곳의 난도가 5.9라고 봤다. 맬러리가 충분히 돌파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1913년, 맬러리는 현재 기준으로 5.9급으로 평가받는 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맬러리 루트’를 올랐다. 맬러리가 등반한 곳 중 최고 난도였다. 이걸 통해 그의 등반능력을 계량화 할 수 있는 것이다.

⑦ 맬러리는 세컨드 스텝을 넘었을까 2 : 오델은 1924년 두 개의 점이 세컨드 스텝을 넘는 걸 봤다고 보고했다. 오델은 후에 세컨드 스텝이 아니라 (그보다 쉬운) 퍼스트 스텝이라고 수정했다. 그러나 말년에 세컨드 스텝이라고 재수정했다.

⑧ 가져갔다는 코닥 포켓 사진기는 어디에 : 맬러리의 시신에는 코닥 포켓 사진기는 없었다. 만약 이 사진기가 발견돼 그 속에 있는 필름을 현상할 수 있다면, 그리고 사진이 에베레스트 등정을 기념하는 내용이라면 에베레스트 세계 첫 등정자는 1953년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톈징 노르게이가 아니라 1924년의 맬러리와 어빈으로 바뀔 수 있다.

⑨ 시신 이외의 의문점 : 맬러리는 자신의 캠퍼스를 캠프6 텐트에 놔두고 갔다. 1933년 영국 4차 원정대가 캠프6에서 찾은 전기 토치도 놔두고 갔다. 그리고, 어빈의 시신은 어디에 있을까.

맬러리가 에베레스트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엔… 

1924년 6월 11일 롱벅에서 런던까지 암호 전문이 날아갔다. ‘Obterras London-Mallory Irvine Nove Remainder Alcedo–Norton Rongbuk.’ 6월 19일에 전보가 런던에 도착했다.

‘Voiceful Lud belighted Charles’라는,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 암호문을 기대했던 런던은 경악했다. 더 타임은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알았지만 엠바고를 지켰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가제트가 엠바고를 깼다. 에베레스트 위원회는 맬러리와 어빈의 가족에게 전보를 보냈다. 두 줄의 위로 전문이었다. 맬러리의 아내 루스는 조용히 친구들과 산책을 했다. 그리고 아이 셋을 침대 위에 모아놓고 슬픈 소식을 전했다.

에베레스트에 있던 맬러리가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1924년 5월 27일 작성)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촛불이 다 타들어가고 이제 그만 써야겠소.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당신의 걱정은 사라질 것이오. 빨리 당신에게 좋은 소식 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요. 무한한 사랑을, 당신의 영원한 조지.’ 이 편지는 사망 전보보다 늦게 도착했다.

맬러리와 어빈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산행의 완성은 어디에 있을까. 1953년 에베레스트 첫 등정자가 된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는 “완벽한 등산은 평지에 안전하게 되돌아오는 것이다”라고 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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