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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등산사] 8000m급 첫 등정…대장은 정상 촬영 몰두, 대원은 "미쳤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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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호 면

N 28° 35′ 44.4336″ W 83° 49′ 13.9224″. 안나푸르나 정상.
모리스 에르조그(당시 31세)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루이 라슈날(당시 28세)은 불안했다. 빨리 내려가고 싶어 했다. 에르조그는 배낭에서 사진기를 꺼냈다. 피켈에 프랑스 국기를 걸고 라슈날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흑백 필름을 컬러로 바꾸기도 했다. 라슈날은 그런 에르조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미쳤군.”

1950년 6월 프랑스의 모리스 에르조그가 안나푸르나 등정 성공 뒤 하산 중 찍은 사진. 그의 손은 동상에 걸려 처참한 상태였다. 몇 시간 뒤, 그의 이 손가락은 모두 사라졌다. 중앙포토

1950년 6월 프랑스의 모리스 에르조그가 안나푸르나 등정 성공 뒤 하산 중 찍은 사진. 그의 손은 동상에 걸려 처참한 상태였다. 몇 시간 뒤, 그의 이 손가락은 모두 사라졌다. 중앙포토

1950년의 프랑스 안나푸르나 원정대. 왼쪽부터 루이 라슈날, 자크 오도, 가스통 레뷔파, 모리스 에르조그, 마르셀 샤츠. 중앙포토

1950년의 프랑스 안나푸르나 원정대. 왼쪽부터 루이 라슈날, 자크 오도, 가스통 레뷔파, 모리스 에르조그, 마르셀 샤츠. 중앙포토

루이 라슈날의 일기를 바탕으로 1956년에 나온 책. 라슈날은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스키 사고로 숨졌다. 중앙포토

루이 라슈날의 일기를 바탕으로 1956년에 나온 책. 라슈날은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스키 사고로 숨졌다. 중앙포토

8000m급 정상에 발자국을 남긴 최초의 국가는 프랑스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수차례 에베레스트(8848m)에 도전했다가 번번이 실패한 영국을 질러갔다.
1950년 6월 3일 오후 2시 경, 에르조그와 라슈날은 몬순을 코앞에 두고 안나푸르나(8091m) 등정에 성공했다. 사전 정찰 없이, 사실상 단 6일 만에 세계 10번째 높이의 봉우리에 오른 것이었다.

■ 1950년 프랑스 원정대<상> #원정대장 에르조그 등반력·리더십 의문 #산악협회장이 대원들에 복종 선언 시켜 #다울라기리 두려워 포기, 안나푸르나로 #에르조그 정상서 기념사진 찍기에 바빠 #동행한 라슈날 "어두워지는데, 미쳤군" #에르조그, 장갑 떨어지자 쳐다보기만 #대신할 여벌 양말 있어도 쓸 생각 못해

에르조그는 국가 영웅이 됐다. 그는 1958년 프랑스 체육부 장관에 임명됐고 1968년에 샤모니 시장에 당선됐다. 그리고 여러 차례 기업 수장을 지냈다. 에르조그는 안나푸르나에 손가락과 발가락을 바쳤고 안나푸르나는 그에게 부와 명예를 줬다. 역시 모든 발가락을 이 여신(안나푸르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수확의 여신’을 뜻함)에게 바친 라슈날은 에르조그에 가려졌다. 미국 작가 데이비드 로버츠는 『트루 서밋』에서 에르조그가 이기적이었고 상업적이었다고 적는다. 지난 12월 13일은 에르조그 사망 6주기였다.

걸출한 산악 가이드인 가스통 레뷔파, 루이 라슈날, 리오넬 테레이를 포함해 9명이 1950년의 프랑스 원정대를 이뤘다. 프랑스 알파인 클럽은 에르조그를 등반대장으로 임명했다. 데이비드 로버츠는 『트루 서밋』에서 ‘에르조그는 알프스에서 등반 성과를 보여줬으나 그렇다고 등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고 썼다. 8000m급 등반의 리더를 맡기기에는 물음표가 많았다는 얘기다.

프랑스 알파인 클럽 회장 루시앙 데비는 그게 걱정이 됐을까. 그는 출국 이틀 전 대원 9명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했다. 에르조그는 훗날 이 자리에 대해 “숭고한 분위기가 흘렀다”고 했다. 말을 이어가던 데비는 갑자기 대원들에게 등반대장 에르조그에 대한 복종 선서를 요구했다.  “나는 원정대장(에르조그)의 어떠한 명령에도 복종할 것을 선서한다” 데비가 따라하라며 외쳤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테레이는 중얼중얼 복창했고 다른 사람들도 한명씩 선언을 했다. 에르조그는 산악서적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안나푸르나』에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자신을 나에게 맡겼다. 팀이 탄생했다.” 데비는 에르조그의 친구였다.

파리스 매치에 실린 모리스 에르조그의 안나푸르나 등정 사진. 이 사진을 계기로 에르조그는 프랑스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중앙포토

파리스 매치에 실린 모리스 에르조그의 안나푸르나 등정 사진. 이 사진을 계기로 에르조그는 프랑스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중앙포토

160명의 일꾼, 8명의 셰르파, 6톤에 달하는 장비와  9명의 대원. 프랑스 원정대는 3월 30일 히말라야로 향했다. 나일론으로 만든 의류와 다운재킷 등 당시로는 첨단으로 무장했다. 그래서 일명 ‘나일론 부대’라고도 불렸다.

글과 사진으로만 히말라야를 접했던 그들은 히말라야 미려함과 위세에 압도당했다. 에르조그는 1951년 ‘히말라얀 저널’에 이렇게 썼다.
‘그동안 나온 자료를 보니, 탄징의 고개에서 히말라야 산군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고개에 올랐다. 반짝이고 또 반짝이는 얼음봉우리들이 웅장한 벽을 치고 있었다.’ 테레이는 ‘성스러운 매력이 깃든 곳’이라고 표현했다.

4월 22일 다울라기리(8167m)를 마주한 에르조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 위에서 호령하고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앞에서, 나는 차마 그 산을 마주보기조차 겁났다.’

5월15일까지 다울라기리와 안나푸르나 정찰 시한으로 정한 원정대는 그 하루 전인 14일에 결론을 내렸다.
“엄청나군, 다울라기리. 어렵겠어.”
원정대는 안나푸르나로 발길을 돌렸다. 몬순이 몰려오기 2주 전이었다.

가스통 레뷔파. 1950년 프랑스의 8000m급 첫 등정 성공에 큰 도움을 준 그는 1985년 남성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중앙포토

가스통 레뷔파. 1950년 프랑스의 8000m급 첫 등정 성공에 큰 도움을 준 그는 1985년 남성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중앙포토

1950년 프랑스의 안나푸르나 원정대 일원이었던 리오넬 테레이.  중앙포토

1950년 프랑스의 안나푸르나 원정대 일원이었던 리오넬 테레이. 중앙포토

결론부터 말하면, 이 원정대는 정찰과 등반을 모두 한 시즌에 이뤄냈다. 영국의 1935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정찰대장을 맡았던 에릭 십튼이 에르조그의 『안나푸르나』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런 성과는 경이로운 것이었으면서도 불행이었다. 대원들의 에너지는 떨어졌고 2개월가량의 시간이 흘러갔다. 원정대는 서둘렀다. 대원들은 캠프4A를 나서 캠프5를 구축하려 하자 셰르파 두 명은 위험하다며 등반을 거부한 뒤 캠프4로 철수했다. 7600m 지점의 쿨루와르(눈·얼음이 있는 가파르고 넓은 계곡)가 고빗사위였다.

에르조그는 누가·우유, 여벌의 양말을 배낭에 넣고 정상 공격에 나섰다. 이미 체력이 바닥에서 맴돌았고 산소통을 쓰지 않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날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했고, 한숨도 못 잤다. 라슈날은 가죽 등산화를 후벼 파는 한기에 떨고 있었다. 발의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다.
“에르조그, 내가 못 올라가겠다면 어떻게 할 건가.”
“그럼 나 혼자 가지.”
라슈날은 그를 내버릴 수 없었다. 둘은 기어이 정상에 올랐다. 그들은 작은 기념탑이라도 만들 돌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카메라 조작하기도 힘들었지만 에르조그는 사진을 찍기 바빴다. 자신의 스폰서(후에 미쉐린으로 합병된 타이어 제조사 클레버) 홍보물을 펼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라슈날은 그런 에르조그를 채근했다.
“빨리 내려가야지.”

1950년 프랑스의 안나푸르나 원정대 일원이었던 리오넬 테레이의 등반 모습. 중앙포토

1950년 프랑스의 안나푸르나 원정대 일원이었던 리오넬 테레이의 등반 모습. 중앙포토

1950년 프랑스의 안나푸르나 원정대 일원이었던 가스통 레뷔파의 등반 모습. 중앙포토

1950년 프랑스의 안나푸르나 원정대 일원이었던 가스통 레뷔파의 등반 모습. 중앙포토

에르조그는 훗날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른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렇게 강하고 순수한 행복은 처음이었다.’ 반면 라슈날은 테레이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공허감으로 가득찬 고통.’

여하튼, 시간을 지체한 에르조그도 불안했다. 먼 하늘에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몬순의 전조였다. 에르조그는 남은 우유를 마셔버리고 그 통을 정상에 버렸다. 이 통은 프랑스 원정대가 정상에 남긴 유일한 ‘기념품’이었다. 라슈날이 서둘러 내려갔고 에르조그가 뒤따랐다. 에르조그는 잠시 뒤 숨을 돌리며 배낭을 뒤졌다. 배낭을 연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스르르, 배낭을 여느라 벗어둔 자신의 장갑이 산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에르조그는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에르조그는 여벌로 챙긴 양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장갑을 대신할 수 있는 소중한 장비였다. 더욱 심각한 건, 자신이 장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손은 보라와 흰색이 버무러져, 나무처럼 딱딱하게 변했다. 라슈날은 사라졌다. 길을 잃었다. 죽음의지대, 그들에겐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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