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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 칼럼

소득주도 성장 심판할 저승사자가 어른거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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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2년간 문재인 대통령의 단골 발언 중 하나가 “거시 지표는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뒤에는 꼭 “경제성장률은 지난 정부보다 나아졌고 수출도 6000억 달러로 사상 최대”라는 자랑을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물가상승률·실업률·외환보유액 등만 입에 올린다. 가장 중요한 지표인 성장률과 수출·설비투자는 쏙 빼버린다. 올 1분기 10년만의 최저성장(-0.3%)이나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설비투자(-10.8%), 5개월 연속 감소한 수출은 내세우기 부끄러운 수치다.

알맹이 거시 지표들 나빠져 #국가 신용등급 떨어질 수도 #한·일 통화스와프 복원 등 #최후의 안전판 마련할 때

그럼에도 대통령은 “거시적으로 볼 때 한국 경제는 크게 성공했다”는 유체이탈 화법을 고집하고 있다. “현실을 인정 않는 정부의 존재 자체가 더 큰 위기”라는 경제학자들의 경고에는 귀를 막는다. 여기에는 소득주도 성장의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정치적으로 자멸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깔려있다. 일단 내년 총선까지 재정을 퍼부으며 버텨보겠다는 계산이지만, 생각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한국 경제를 심판할 저승사자가 슬금슬금 다가오기 때문이다. 바로 국제 신용평가사들이다.

지난달 24~26일 무디스의 연례협의단이 방한했을 때의 일이다. 홍남기 경제 부총리는 24일 오후 이들을 접견하기에 앞서 이날 오전 6조7000억원의 추경예산을 공식 발표했다. 발표 타이밍까지 무디스를 의식한 셈이다. 그만큼 정부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튿날(25일) 한국은행이 1분기 성장률 -0.3%를 발표하면서 김이 샜지만 말이다.

다음은 무디스 협의단을 만났던 국내 이코노미스트들이 전하는 심상치 않은 흔적들이다.

그들의 관심은 무엇이었나.
“예년과 달리 북핵 질문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 경제 수치와 전망은 다 알고 들어온다. 올해는 ①성장률 목표(2.6%)는 달성 가능한가 ②세수 전망이 어두워지는데 재정 건전성이 나빠지지 않겠는가 ③과도한 반도체 편중 현상의 대안이 무엇인가 ④친(親)시장적이던 한국에서 왜 민주노총 같은 반(反)시장주의가 득세하는가 등 4가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국가 신용등급을 떨어뜨릴까.
“당장 현재의 Aa3 등급을 Aa2로 떨어뜨릴 가능성은 50% 이하일 것이다. 하지만 향후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바꿀 가능성은 아주 높아 보인다. 이는 6개월 이내에 부정적 요인이 개선되지 않으면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겠다는 예고나 다름없다.”
어떤 후폭풍이 예상되나.
“1999년 2월 이후 한국은 신용등급이 12차례 꾸준히 올랐다. 보수·진보 정권 가릴 것 없이 단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 그런 신용등급이 20년 만에 하향조정된다면 문재인 정부는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더 이상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우기기도 어렵다.”
어떻게 신용등급 유지할 수 있나.
“세계 흐름과 정반대의 정책 방향은 위험하다. 선진국들이 ‘작은 정부’로 가는데, 우리만 ‘큰 정부’다. 다들 ‘감세’가 대세인데, 한국만 ‘증세’를 고집한다.”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국가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경제정책을 펼 공간이 좁아진다. 재정 건전성 때문에 지금처럼 대놓고 재정을 퍼붓기 어렵다. 경기부양을 위해 기준 금리를 내리기도 쉽지 않다. 환율 급등에 따른 외국 자본의 이탈까지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갈수록 분위기는 어두워지고 있다. 무디스는 지난해 말부터 현대차·모비스 등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바꾸었다. 지난 3월에는 투자 부진과 수출 악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 위축을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성장률 전망치를 2.1%로 깎아내렸다. 4월 초 방한한 S&P 평가단도 “소득주도 성장이 신용등급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 경고했다.

무디스의 신용등급 판정은 다음 달쯤 나온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원화 환율이 가파르게 치솟고 북한은 다시 미사일을 쏴대고 있다. 미·중 통상마찰이 질질 끄는 것도 좋지 않은 신호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지금쯤 한·미 통화스와프는 힘들다고 해도 한·일 통화스와프 정도는 복원해 최후의 안전판을 마련해야 할 때다. 하지만 위기의식이 없다는 게 더 큰 위기다. 청와대는 ‘좋은 경제 숫자’ 찾기에 신경이 팔려 있다.

지난주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소득주도 성장의 최대 피해자는 자영업자와 저소득층이고 최고 수혜자는 한국당”이라며 혀를 찼다. 경제가 망가지면서 한국당만 엄청난 반사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청와대는 꼭 14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가지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있다. 정부 역할은 어떻게 시장을 공정하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고백이다. 지난 2년간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공시지가·카드 수수료 같은 시장 가격에 전방위로 개입했다. 노 대통령의 충고를 잊은 채 정부가 시장을 통제하고 끌고 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