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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와 여흥’ 두 얼굴의 부소산성 품고, 백마강은 흐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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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5호 14면

이훈범의 문명기행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삼천 궁녀의 전설을 기억하는지 못 하는지 무심하게 흐른다. [박종근 기자]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삼천 궁녀의 전설을 기억하는지 못 하는지 무심하게 흐른다. [박종근 기자]

성(城)이란 양가적인 함의를 가진다. 외적의 침입을 막는 군사적 공간 개념에, 왕과 귀족들의 여흥 장소 개념이 겹친다. 영어의 ‘캐슬(castle)’, 프랑스어의 ‘샤토(chateau)’, 독일어의 ‘슐로스(schloss)’도 마찬가지다. 평상시에는 ‘노는’ 곳이고 비상시에는 ‘막는’ 곳인 것이다.

백제 멸망 당시에 수도 지킨 방벽 #연회 즐기던 왕의 놀이터 역할도 #정자는 장수 장대보다 높은 곳에 #동쪽 영일대, 서쪽 송월대 지어 #백마강 유래엔 소정방 낚시 전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 특히 많은 산성(山城)은 더욱 그렇다. 평화시 도성에 머무르며 정사를 보는 왕과 귀족들에게 산성은 훌륭한 ‘소풍’ 장소였다. 가장 높아 전망이 뛰어난 곳에 우아한 정자가 있는 게 다른 이유가 아니다. 장수가 올라서 전투를 지휘하던 장대(將臺)보다 더 높은 곳에 대체로 정자가 있었다.

디즈니랜드 랜드마크 성의 모델이 됐다는 독일 퓌센의 노이슈반슈타인성도 다름 아니다. 군사적 목적이 외적의 침입 대비가 아닌 루트비히 2세의 현실 도피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올 법한 산꼭대기의 성으로 피해 바이에른왕국의 몰락이라는 굴욕적 현실을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무리한 건축비가 왕국의 몰락을 앞당겼지만, 당초 계획의 3분의1밖에 지어지지 않고도 지고한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이 동화 같은 성은 오늘날 전 세계 관광객들을 끌어모으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산 아래 강이 흐르는 경우는 그야말로 최고의 입지다. 강물이 천혜의 방벽이 될 뿐더러 아름다운 전망을 즐길 수 있고 게다가 물놀이까지 가능하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백제의 옛 산성들, 공주의 공산성과 부여의 부소산성이 그렇다. 특히 백마강(금강이 부여를 지날 때의 이름)이 흐르는 부소산성은 백제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수도를 지킨 성이면서 왕의 놀이터였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무왕 37년(636) 3월에 왕은 좌우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백마강) 북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포구 양쪽 언덕에 기암 괴석이 서있고 그 사이에 기이한 꽃과 희한한 풀(奇花異草)을 심었는데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흥이 극도에 이르러 북을 치고 거문고를 뜯으며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신하들은 번갈아 춤을 추니, 이때 사람들은 그곳을 대왕포라 불렀다.”

공주 공산성과 함께 ‘배산임수’의 입지

부소산 정상에 있는 사자루. 백제 때는 송월대가 있었다. [박종근 기자]

부소산 정상에 있는 사자루. 백제 때는 송월대가 있었다. [박종근 기자]

『삼국사기』가 백제 수도와 관련해 간략하기 짝이 없는 기록만 남기고 있는데 비하면, 참으로 자세한 설명이다. 그만큼 잦았던 왕의 물놀이가 인상적이었나 보다. 조선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 같은 지리서에도 “현에서 남쪽으로 7리 떨어졌다”는 대왕포의 위치만 추가했을 뿐 같은 내용이 그대로 적혀있다.

부소산성 동쪽의 영일루. [박종근 기자]

부소산성 동쪽의 영일루. [박종근 기자]

이 밖에 부소산성 내에는 짝을 이룬 두 개의 정자가 있었다. 해돋이를 볼 수 있는 동쪽 산 정상에 영일대(迎日臺), 달맞이를 즐기기 위한 서쪽 산 정상에 송월대(送月臺)를 지었다. 왕이 해 뜨는 새벽부터 달 지는 다음날 새벽까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자리였겠지만,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풍류를 즐기기에도 부족함이 없었을 터다. 지금 영일대 자리에 있는 영일루는 1964년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고, 송월대 자리에는 1919년 역시 다른 곳에서 옮겨다 놓은 사자루(泗泚樓)가 서있다. 사자루가 있는 자리는 해발 106m로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뭐니뭐니해도 낙화암이다. 백마강에 맞닿은 벼랑이다. 『삼국유사』는 『백제고기(百濟古記)』를 인용해 “모든 후궁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 서로 이끌고 이곳에서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를 보아 후세에 와서 후궁이 궁녀로 와전되고 숫자 또한 삼천(三千)으로 과장됐으며, 궁녀를 꽃으로 미화해 타사암을 낙화암으로 바꿔 부르게 됐음을 알 수 있다.

삼천이란 숫자는 중국 시에서 ‘만(萬)’과 함께 ‘많은’을 뜻하는 은유로 흔히 쓰이던 문학적 표현이다. 이를 조선시대 문인들이 시가에서 인용하면서 ‘삼천 궁녀’의 전설이 탄생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흥 지나쳐 방어할 수 없는 상황 되면…

부여 왕궁이 있었던 관북리 유적지. [박종근 기자]

부여 왕궁이 있었던 관북리 유적지. [박종근 기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낙화암 아래로 커다랗게 튀어나온 바위가 있어 낙화암에서 뛰어내린다고 바로 강물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뛰어내리기 더 무서웠을 텐데 백제 후궁들의 용기가 그래서 더욱 놀랍다. 튀어나온 바위 아래 쪽에 새겨져 있는 ‘낙화암’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낙화암 위에 선 육각지붕 정자는 1929년 당시 부여군수가 죽은 궁녀의 원혼을 달랜다고 세운 것인데, 과장이 싫었는지 이름을 백화정(百花亭)이라 붙였다.

대왕포와 낙화암 사이 백마강 중간에 어른 한 명이 앉을 만한 작은 바위 하나가 솟아있는데 ‘조룡대(釣龍臺)’라 불린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소정방이 사비도성을 함락한 뒤 백제군과 부소산성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백마강에 돌풍이 일어 대왕포에서 낙화암까지 정박해 있던 당나라 군선 수백 척이 침몰했다. 놀란 정방에게 일관(日官)은 “백제를 지켜온 강룡(江龍)이 노한 까닭”이라며 “강룡이 좋아하는 백마를 미끼로 잡으라”고 일렀다. 이에 정방은 쇠창으로 낚싯대를 만들고 철사로 만든 낚싯줄에 백마를 꿰어 용을 잡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룡대라 부른다고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용암(龍嵓)’으로 소개되는 걸 보면 조룡대로 이름이 바뀐 건 고려시대 이후다.

소정방의 용 낚시는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나오는 전설인데, 원문에는 모두 용이 ‘어룡(魚龍)’으로 돼있다. 부소산성을 함락한 뒤 소정방이 백마강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다 커다란 장어 한 마리를 건져 올렸는지 모르겠으나, 후대로 오면서 물고기가 용으로 과장되고 역사가 전설로 물든 것이다. 어쨌거나 부여 일대의 금강이 백마강으로 불리게 된 것 또한 소정방의 낚시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도 함께 전한다.

부소산성을 얘기하면서 군창터를 빼놓을 수 없다. 영일대 조금 아래 너른 터에 자리 잡았던 곡식창고였는데, 1915년 칡뿌리를 캐던 아동이 검게 탄 탄곡(炭穀) 더미를 발견했다. 쌀과 보리, 콩, 녹두였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군이 군량을 적군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불을 지른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건물 터만 표나게 하고 잔디를 심어 놓아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먹지도 못하고 비축해 놓았던 곡식이 타는 불길을 뒤로 하고 달아나야 했던 백제 병사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사뭇 숙연해진다.

성을 여흥 장소로 쓰는 것이 방어하는데 쓰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훨씬 나은 일이다. 하지만 여흥이 지나치면 성이 아무리 높아도 방어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리다.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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