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시민 이대로 좋은가 (4) 신분 서열따라 수직적 인간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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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K대 최 모 교수(46)는 최근고교선배인 고급관료에게 「님」자를 붙이지 않은 채 전화를 걸었다가 비서실의 호통 (?) 에 낭패감을 맛봐야했다.
비서실에서 『무슨 일이냐, 어떤 관계냐』를 꼬치꼬치 묻더니 『후배라면 왜「님」자를 붙이지 않느냐』고 사뭇 시비조로 나오더라는 것.
『나중에 생각해보니 비서실에서 직함 뒤에 이 「님」자를 붙이고 안 붙이는 것에 따라 전화 건 상대방의 신분상 높낮이를 파악하는 것 같더군요.』최 교수는 순간의 낭패감 뒤에 오는 씁쓸한 기분을 아직까지 지울 수 없다고 말한다.
지난해 9월 서울이 온통 올림픽열기로 들떠있던 어느 날 서울올림픽조직위 사무실에 한 낯선 외국인연락관이 상기된 표정으로 찾아와 때아닌 항의소동 (?) 을 벌여 직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유인즉 조직위 현관1층에 대기해있던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순간 여자 안내원이 황급히 다가오더니 끌어내다 시피하며 타지 못하게 하더라는 것. 영어로 이유를 물었으나 의사소통이 안돼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떼밀려 내렸다가 한참 기다려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야했다.

<엘리베이터도 1인 전용>
뒤에 확인결과 이 제지소동은 이 엘리베이터가 「위원장전용」이었기 때문.
「위원장 예우도 좋지만 오직 한사람만을 위해 많은 이용객들에게 불편을 주는 이 같은 처사는 세계 어느 올림픽 개최 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라는 조소 섞인 말을 남기고 그 외국인은 떠났다는 후문이다.
최 교수의 낭패감이나 이 외국인의 항의소동은 바로 우리사회의 뿌리깊은 서열의식에서 비롯된 낯뜨거운 일들이다.
상대방의 신분서열에 따라 전화 받는 태도도 모양새가 달라지고 엘리베이터도 자신의 서열에 맞는 것을 골라 타야 이 같은 봉변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
전통유교문화와 가부장 사회에서 길들여진 서열의식에서 아직 몇 발짝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사회구성원들이 동등한 인격체로 대접받기보다 재산·학벌이나 지위·신분에 따라 상하 존비·귀천으로 구분돼 우열이 정해지기 일쑤다.
어느 모임에서고 자신의 서열에 맞는 좌석을 찾으려고 쭈뼛거리고 회합 때는 아랫사람이 일찍 참석하고 윗사람은 으레 늦게 참석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권위주의를 밑바탕으로 한 서열의식이 우리사회에서 얼마나 엉뚱하게 작용하고 있는가는 자주 볼 수 있다.
회사원부인 이 모씨(25).지난 6월초 남편을 따라 회사야유회에 갔다온 후 예기치 않은 부부싸움을 한바탕 치렀다.
입사 2년째의 남편 서열 따라「부장사모님」「과장사모님」앞에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평사원」임을 절감해야 했기 때문.

<「부장사모님」도 부장행세>
『아유 미안해서 어쩌지』라는「사모님」들의 한마디 겉치레인사말 뿐 야유회의 뒷바라지는「평사원부인들」차지가 당연했다.
『이것저것 가져 오라』는 잔심부름은 물론 사모님으로부터 밥과 찌개가 잘못됐다는 은근한 꾸지람(?)까지 들어야했다. 「부장사모님」은 역시 부장이었다.
이 부인은 무언가 자존심을 무시당한 것 같은 뾰로통한 마음에 집에 돌아와 무심코 『당신 별 볼일 없데요…』라는 말을 남편에게 한 것이 그만 부부싸움으로 변해버렸다.
사물을 종적·서열 적으로 파악하려는 한국인의 수직적 사고에서 비롯된 이 같은 서열의식은 전통사회에서는 법이나 규칙 없이도 우리사회의 질서를 유지해온 원동력이요 구심점이었다.
또한 민주사회에서도 경험과 능력·참권 위에 바탕을 둔 위계 적인 인간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특히 조직 속에서의 상사와 부하의 관계라든지 부모에 대한 공경심, 노인에 대한 경로사상 등은 아랫사람과 윗사람의 도리가 민주사회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서구인의 서열의식은 일과 집단의 발전을 위한 계약 적인데 비해 우리사회는 신분적이라는데 그 병인이 도사리고 있다.
미국의 과장이나 부장 등 간부는 직책·직능상의 관리능력자이면 족하다. 그러나 우리의 부장이나 사장은 주종·부자·사제와 같은 이면적이고 전 인간적인 관계가 복합된다.
이 때문에 출퇴근 때 상사는 부하직원들이 마중해야 성깔이 차고 이따금 출국이라도 할 때는 필요이상의 많은 부하직원들이 공항대합실에 몰려나와 혼잡을 빚는다.

<질서 유지해온 원동력>
퇴근시간이 되었어도 윗사람이 일어서지 않으면 서로 눈치를 보며 하는 일 없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몸에 배어있고 당연한 처세술로 안다.
또 상사의 비위f에 거슬리는 일이면 옳은 말도 직언을 기피하고 공식석상에서의 의견개진에도 지나치게 윗사람 눈치를 본다.
『한국 사람은 솔직성이 부족합니다. 상담을 할 때 특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갈이 있을 경우 대체로 하급 자 들은 자신의 의견제시를 꺼리는 경향이 많습니다.』이 때문에 상담이 깨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미국인「데이비드·톰슨」씨 (42)는 말한다
한때 『지당하십니다』는 말이 유행하고 샐러리맨사회에서 『알아서 긴다』는 말이 나온 것 도 직언기피의 타성적 사회보편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한다.『혈연·신분관계로 규정되는 전통사회에서는 불평등한 서열의식이나 가부장적 권위가 그대로 받아들여졌지만 시민사회에서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 권위는 아랫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게돼 상하간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잘못 인식된 서열의식은 아랫사람에게는 열등감과 아부근성·비굴함을, 윗사람에게는 우월감과 오만함을 심어줄 뿐 아니라「면종 복배」라는, 또 다른 2중 적 행동규범을 가져온다고 임희섭 교수(고대·사회학)는 지적한다.

<아랫사람에겐 호통 일쑤>
이 결과 윗사람에게는 약하고 아랫사람에게는 호통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또 아랫사람이나 신분 낮은 사람의 요구나 주장은 쉽게 무시되고 아래로 향한 일방통행의 명령만이 있을 뿐이라는 분석이다.
인간관계를 상하·종속의 관계로 파악하는 서열의식에서 나온 그 같은 행동·생활양태가 민주시민이 지녀야할 행동규범이 아님은 분명하다.
민주주의는 인간 대등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떳떳하고 당당하며 상대를 1대1로 대하는 올바른 파트너십의식이 없이 민주사회건설을 말할 수 있을까? 서구민주사회에서는 코흘리개 꼬마 때부터 스스로, 또 어른들도 당당히 1대1의 인격으로 행동하고 상대한다.
민주의 싹은 여기서 비롯되고 있음을 본다. 서열의식만 팽배한 사회는 일방통행이 있을 뿐 민주사회의 특성인 다양성, 혼돈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힘의 분출과 발전력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사회학자들은 의견을 같이한다.<정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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