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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나라살림 500조 시대, 예산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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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신해룡 전 국회예산정책처장

신해룡 전 국회예산정책처장

예비 타당성 조사 면제부터 시작해 초과 세수, 국채 발행 과정, 추경 편성에 이르기까지 나라 살림과 관련한 일련의 논의 과정을 보면 예산에 관한 철학이 매우 빈곤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재정 포퓰리즘’은 독약 될 것 #60년 건전 재정 전통 지켜야

내년도 예산 규모는 500조원이 넘을 것으로 예측된다. 2017년도에 400조원을 넘어선 지 불과 3년 만이다. 예산 규모가 과속으로 치닫고 있는 현시점에서 정부나 정치권은 나라 살림에 대한 장기적 시계(視界)와 재정 규율을 확고히 정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정확대는 마약, 재정 포퓰리즘은 독약’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예산 철학은 부국안민(富國安民)으로 가는 나라 살림의 나침반이다. 예산(BUDGET)을 뜻하는 영어 단어에서 국가 재정 운영에 적용 가능한 건실한 예산 철학적 함의를 찾아보자.

먼저 B는 균형(Balance)이다. 국가의 재원 범주에서 절약과 균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정부와 민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기능 분담 원칙을 합의하고 지켜야 한다. 유사한 사업을 비교하는 균형과 비례의 감각을 통해 예산 한도액을 억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U는 예산의 사용처와 우선순위(Usability) 문제다. 예산을 다루는 자는 공공성에 관한 정보의 조정자다. 매년 재정 지출이 국민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분석에 기초해 ‘정책이 있는 예산’과 ‘노선이 분명한 예산’을 만들어야 한다. 국민의 재정 수요를 면밀히 검토해 합리적이고 우선순위에 입각한 재원 배분이 이뤄져야 한다.

D는 부채(Debt)와 적자(Deficit) 문제다. 미국 하버드대 니얼 퍼거슨 교수는 제국의 몰락이 ‘한밤의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역대 제국의 몰락이 재정위기와 관련 있다고 강조했다.

재정 수입과 지출 간에 심한 불균형이 역대 제국을 번번이 벼랑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부채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에 부채 관리에 힘쓰는 것이 당연한 정책의 귀결이다.

G는 세대 회계(Generational accounting) 문제다. 세대 회계는 현재의 정책 결정이 미래 세대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 분석하고, 현시점에서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 비용 때문에 미래 세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채무를 지는 것을 방지하자는 게 핵심이다. 『세대 충돌』의 저자인 보스턴대 로런스 코틀리코프 교수는 “고령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미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정책 변화가 시급한데도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해 기성세대를 건드리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E는 효율성(Efficiency)이다. 이를 고려해서 재정 누수를 방지해야 한다는 의미다.핵심은 재정 지출의 가치, 즉 돈값을 하는 재정 관행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온 크고 작은 예산사업 중 애초에 시도하지 말았어야 할 사업을 강행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예산 낭비가 있었는지, 값비싼 사례 하나둘 정도는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T는 타이밍(Timing)이다. 그야말로 한정된 예산을 적재적소에 적시(適時)에 투입할 수 있어야 한다. 예산정책 수립의 필요성 인식부터 실제 실행안을 마련하고 집행해서 효과를 볼 때까지 시차가 작용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예산투입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자리 창출과 혁신 성장동력 확충 및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재정 압박은 ‘재정 알코올 중독’(Fiscal alcoholism)으로 이어지고 결국 브레이크 없는 재정 충격으로 귀착될 것이다. 대한민국 60년 건전 재정의 전통은 어떤 상황에서도 견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다가올 불확실성 이슈에 대한 국가의 재정 실행능력이 유지되고 강화된다. 건전한 재정 없이 건전한 정부는 있을 수 없고, 건전한 정부 없이 건전한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신해룡 전 국회예산정책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