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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매카시즘을 부르는가-권영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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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위스콘신 시골의 무명 변호사였던 「조제프·매카시」가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지 4년 만인 1950년, 국무성 속에 1백여명의 공산주의자가 득실거리고 그 두목이 「오웬·라티모어」라는 폭탄선언이 「매카시」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전후 냉전체제가 서서히 굳어지면서 반공애국을 고양시키는 극우세력이 미국사회를 지배할 무렵, 새롭게 부상한 소련과 공산당에 대한 긴박한 대결의식과 소련의 첩보활동에 대한 경계심리가 팽배해 있을 무렵, 「매카시」가 던진 작은 폭탄은 가위 원폭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한번 불기 시작한 「매카시」선풍은 위로는 차관급에서 밑으로는 우편배달원에 이르는 2천 여명의 공무원을 추방시켰고 간첩혐의를 받았던 고위공직자중엔 심장마비로 죽거나 자살하는 사례까지 빚었다.
미국의 민주정치 발전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던 매카시즘은 시대분위기를 이용한 극단적 정치술수가 얼마만큼 잔인한가를 보여주는 경세훈으로서 우리에겐 아직도 소중한 교훈으로 남아있다.
서경원 의원 사건으로 위기와 불안의 국면이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있는 이 시기, 이 시점에서 왜 하필이면 매카시즘을 들먹이냐고 나무라기에 앞서, 우리가 해방 45년의 정치사 속에서 매카시즘의 늪을 과연 벗어나 본적이 있는가를 되돌아 봐야만 한다.
그것이 극우든 극좌였든, 남쪽이든 북쪽이었든 자기 집단의 이익과 불법한 정권유지를 위해 얼마나 많은 매카시즘이 횡행했던가를 우린 벌써 잊고있다.
「관문파」「미제 앞잡이」라는 죄명으로 북의 하늘에서 숨져간 사람이 얼마였던가. 좌익과 연좌제란 이름으로 남쪽 하늘 아래서 평생 빛을 보지 못한 채 살았던 사람 또 얼마였던가.
평양에 밀 입북한 전대협 대표는 세계의 관심이 쏠린 기자회견장에서 외쳐댔다. 남쪽의 백만 학도는 통일을 염원하고 정부와 수구세력은 통일을 방해하는 반통일 세력이라고 몰아붙였다. 1인 독재의 세습왕조인 북의 정권은 통일염원세력이고 국민적 합의와 민주적 절차로 수립된 남쪽의 정부는 반통일 세력이라고 규정짓는다.
누가 통일을 바라지 않는가. 주사파의 논리와 베트남식 통일을 우리 모두 바라지 않기에 친북적 통일노선은 소수의 극단적 모험주의로 비난받고 있지 않는가.
미제의 앞잡이, 반통일 정권 밑에서 남쪽 민중들이 신음하고 있다고 선전하는 바로 그 방식이 극좌적역「매카시」수법이다.
민주체제의 질서를 지키며 그나마 뭔가 개혁과 개선을 통해 점진적 개량을 추구하는 세력, 문패나마 붙이고 고만고만 살아가는 기성세대 이 모두가 미제의 앞잡이고 미제 식민지의 예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통일 세력이라고 매도하고 돌팔매질한다. 이 또한 매카시즘이 아니고 무엇인가.
미제의 앞잡이, 반 통일세력으로 몰리는 말없는 다수는 화가 치민다. 전대협 대표가 평양에서 남쪽의 앞잡이들을 매도하고 있고 전민련의 고문 문 목사가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지 이미 오래며 전농련 결성의 실력자 서경원 의원의 북한 밀항이 간첩혐의로 수사를 받고있다.
『민주화 열기 속에 공산당 세상이 되었군!』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군중심리고 이 군중심리를 정치적으로 절묘하게 이용하는 게 극우 매카시즘의 전형이다. 극단적 극좌 모험주의가 결국 극우 매카시즘의 재래를 부르고 극우집단이 이를 잽싸게 이용하지나 않을까 가슴 죄며 눈치를 보는 게 힘없는 백성의 사고양식이다.
「야당의원 중 2, 3명이 더 입북했을 가능성」의 소문이 흘러나온 채 여지껏 소문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출국금지자 명단만 발표되었다. 누가 소환되고 연행될 것이라는 풍문 속에서 입방아에 오르는 의원들은 허둥대며 핏대 높여 자신의 무고함을 해명하기에 바빴다.
국회의원 1명을 연행할까 말까를 결정하느라 1백여명이 탄 여객기를 30여분이나 허공에 맴돌게 했다.
이역만리 날아간 여당 대표가 보수연합의 정계개편을 역설했고 개폐직전까지 갔던 보안법이 그때는 옛날인양 힘차게 살아 숨쉬며 불고지죄라는 낡은 칼이 재야와 언론계·종교계를 왕래하며 외곽을 때리기 시작했다.
친북적 극좌 모험주의자들의 준동에 불안해하는 말없는 다수는 이 불안심리를 이용해서 공안수사가 공안정치로 둔갑해 버렸던 지난 시절 그 두려웠던 환영에 사로잡힌다.
비록 그것이 그림자였다 해도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놀라듯, 힘없는 백성은 이 시국을 가슴 죄며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해야만 한다.
이 땅에 다시금 매카시즘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매카시즘이든 배척되어야만 한다. 지난 시절의 매카시즘이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극좌적 모험주의는 청산되어야 한다.
극좌적 모험주의가 준동할 때 『백 마리 들쥐 앞에 기죽어 사느니 차라리 나보다 힘센 한 마리 사자 앞에 복종하겠다』는 「볼테르」의 경구가 패배적 군중심리로 싹트게 된다.
극좌와 극우의 「매카시」수법이 널뛰듯 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한,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정말 물 건너간 남의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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