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유럽 관계 및 아시아 위상' 주제발표] 윌리엄 파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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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깊어가는 미국과 유럽=올해 초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이라크 전쟁을 언급하면서 "유럽에는 '젊은 유럽' 과 '늙은 유럽'이 있다"고 해 외교가에 파문이 일어난 일이 있다.

장관이 말한 '젊은 유럽'이란 폴란드 같은 옛 동유럽권 국가들로, 이라크전에서 미국을 지지했다. '늙은 유럽'은 프랑스.독일처럼 유럽연합(EU)을 주도하는 서유럽 국가들로, 이라크전을 지지하지 않은 그룹이다.

파문이 컸던 이유는 럼즈펠드나 워싱턴이 유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최근 옛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소위 '젊은 유럽'은 자국 안보 보장을 위해 미국에 접근할 뿐이다. 유럽을 '젊은이''늙은이'로 갈라 이를 이라크 문제에 대한 갈등과 연관시키는 것은 맥락에 전혀 닿지 않는 얘기다.

미국과 유럽은 전에도 여러 문제로 갈등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 미.유럽 갈등의 근본엔 '세계관'에 대한 갈등이 놓여 있다. 9.11 이후 득세하고 있는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유럽을 '미국 헤게모니 확보의 장애물'로 여긴다. 반면 유럽은 '미국은 유럽의 정치적 독립과 주권을 위협하는 존재'라며 꺼린다.

사실 유럽은 거의 모든 외교 사안에서 미국과 의견을 달리한다. 유럽은 미국이 주장하는 '테러리즘' 위협의 본질과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며, 오사마 빈 라덴이 전 세계의 위협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또 유럽은 미국이 주장하는 '불량국가' 주장과 선제공격 전략, 문명 충돌 이론, 아랍-이스라엘 해결 방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은 이런 유럽을 '반미'로 몰아세우고 있다. 워싱턴의 네오콘들은 "유럽이 9.11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내가 만난 한 네오콘 인사는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이라크전에 파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해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내놓는 외교정책의 최대 특징은 '호전성'이다. 미국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래 동맹국이나 다른 국가들을 주권을 가진 동등한 국가가 아닌 '부하'처럼 취급하기 일쑤다. 또 외교적 해결이 아닌 힘으로 밀어붙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북한.이란 같은 나라들이 핵개발에 나서는 것은 이해할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 말은 북한의 핵무기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지만 자국의 안보를 강화하려는 본능에는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는 뜻이다.

윌리엄 파프
정리=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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