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토너 도우미가 또 우승할 뻔 "페이스 메이커 무섭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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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가 또 우승할 뻔 했다."

28일 베를린 마라톤에서 페이스 메이커 새미 코리르(케냐)가 폴 터갓(케냐)과 끝까지 접전을 벌이자 마라톤 관계자들이 한 말이다. 부담 없이 쫓아 뛰면 되는 대상이라는 뜻에서 육상인들은 페이스 메이커를 '토끼(rabbit)'라고 부른다. 페이스 메이커는 마라톤을 포함한 육상 장거리 경기에서 좋은 기록을 내기 위해 미리 정한 속도로 페이스를 유지해주는 선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토끼가 계속 사고를 치고 있다. 베를린 마라톤의 지난해 우승자도 페이스 메이커였다. 세계신기록 보유자가 된 폴 터갓은 2001년 시카고 마라톤에서 끝까지 뛰는 토끼를 잡지 못해 2위에 그쳤다. 1999년 로마 마라톤 등 유수의 국제대회에서 1년에 한두 차례는 페이스 메이커의 우승 소식이 전해진다. 국내에서도 지난 3월 동아 마라톤에서 페이스 메이커가 우승했다.

1954년 로즈 배니스트(영국)는 돈을 주고 산 페이스 메이커의 도움으로 1마일 세계 기록을 냈다. 이를 계기로 육상대회 조직위가 페이스 메이커를 고용하는 일이 이제는 일반화됐다.

페이스 메이커는 육상의 용병이다. 마라톤의 경우 B급 아프리카 선수나 하프마라톤 선수들이 보통 5천달러(약 6백만원) 정도의 돈을 받고 20~30㎞까지 대회 조직위가 원하는 속도를 유지하면서 뛴다. 선두에서 달리므로 바람의 저항이 크고 시간을 꼼꼼하게 점검해야 하기 때문에 고달프다. 정해진 시간의 ±10초 이내에 들어가지 못하면 액수가 절반으로 깎인다.

반면 컨디션이 좋아 페이스를 끝까지 유지, 우승으로까지 이어지면 일약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고, 또 오랫동안 선두에서 뛰기 때문에 무명 선수로서는 이름을 알리기에 좋다는 장점도 있다.

최근에는 세계기록 수립을 원하는 마라톤 대회 간의 경쟁으로 한 대회에 나오는 페이스 메이커의 숫자도 늘어났다. 용돈벌이도 되고 풀코스를 앞두고 뛰는 30㎞ 훈련으로도 적당하기 때문에 때로는 수준급 선수들도 페이스 메이커로 나선다.

성호준 기자

<사진설명>
페이스 메이커로 출전한 새미 코리르(左)가 28일 베를린 마라톤에서 폴 터갓에 이어 2위로 골인하고 있다. 코리르는 터갓에게 1초 뒤진 2시간4분56초의 기록을 세웠다. 3위를 차지한 티투스 문지도 역시 페이스 메이커였다.[베를린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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