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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 폐해' 생각해 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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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근 노동운동가들은 기업별 노조를 산별 노조로 전환하도록 부추기고 있지만 산별 노조라는 게 무엇인지, 왜 산별 교섭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은 해주지 않고 있다.

노동계에서는 산별 교섭이 기업별 교섭에 비해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교섭 방식이라 주장하면서 유럽의 예를 많이 들고 있다. 유럽의 산별 교섭은 같은 산업의 근로자 임금을 일시에 타결함으로써 근로조건의 통일화.평등화를 꾀할 수 있고, 또한 상급 단위 대표끼리 교섭함으로써 기업별로 노사가 직접 부딪치는 것을 피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유럽은 우리처럼 2중.3중 교섭을 하는 게 아니라 중앙단위에서 단 한 차례만 교섭한다. 그나마 이러한 산별 교섭조차도 점차 기업별 교섭으로 바뀌고 있다. 오랜 산별 교섭의 전통을 가졌던 독일에서도 산별 협약을 적용하지 않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으며, 기업별 협약만을 체결하는 기업도 최근 5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중간 수준에서 산별 협약이 체결될 경우 거기에 맞출 수 없는 어려운 기업은 문을 닫게 되고 그만큼의 일자리가 없어지게 되므로, 산별 협약 자체를 노조 스스로 파기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이다. 기업 실정에 맞지 않다면 경쟁력이 확보될 수 없고 일자리가 보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노조 스스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노동운동가들이 주창하는 산별 교섭은 어떤가. 2004~2005년 노사분규의 60% 이상이 산별 교섭으로 인해 발생했다. 산별 교섭을 하면 효율화되고 노사 갈등이 줄어든다는 주장도 허구로 드러났다. 근로조건을 평준화한다는 이상적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산별의 힘을 빌려 개별 기업의 사용자를 압박하는 데 이용돼 왔다.

금속노조 소속 사업장들은 연례행사로 반복되는 산별 총파업으로 큰 타격을 입고 있다. 보건의료노조의 산별 총파업과 서울대병원의 추가 파업으로 환자들이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한 적도 있다. 산별 총파업으로 기업들은 엄청난 매출 손실을 봤고 문을 닫기도 했다. 근로자들은 상급단체의 지침에 따라 파업을 하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산별 노조의 이념이 아무리 합당하다 하더라도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일자리가 없어진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기업 간의 차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하나의 산별로 묶어 일률적인 근로조건을 강요한다면, 이를 감내할 수 없는 기업들은 문을 닫게 되고 이는 결국 일자리를 뺏는 결과만 초래한다.

최근 현대자동차노조를 포함한 몇몇 기업노조들이 산별 전환을 의결했다고 한다. 물론 산별노조로 갈 것인가 기업노조로 남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노조 스스로 결정할 사안이다. 그러나 과연 일반 조합원들이 산별노조가 기업과 그들 자신에게 가져올 폐해에 대해 생각조차 못해보고 결정한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노조가 산별노조가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산별 교섭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들이 산별 교섭에 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용자들이 산별 교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2중.3중의 교섭이 아닌 단 한번의 교섭으로 마무리된다는 확신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또한 산별 교섭의 내용도 일자리 창출에 근간을 두어야 한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사단체가 한마음이 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