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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놓인 교통 표지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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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아스팔트를 캔버스 모양으로 만들어 흰색 페인트로 작업한 아티스트 듀오 엘름그린(오른쪽)과 드라그셋.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스팔트를 캔버스 모양으로 만들어 흰색 페인트로 작업한 아티스트 듀오 엘름그린(오른쪽)과 드라그셋.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05년, 미국 텍사스 지역의 마파 지역의 사막 한가운데 프라다 매장이 들어섰다. 이름은 ‘프라다 마파(Prada Marfa)’. 마른 풀들 너머로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사막에 덩그러니 서있는 프라다 매장은 엉뚱한 장소에 있는 명품 매장의 ‘생경함’ 그 자체로 눈길을 모았다.

엘름그린·드라그셋 서울 개인전 #세계 미술계 경악시킨 듀오 작가 #통제·지시에 얽매인 현대인 비꽈 #황량한 사막에 프라다 매장 세워 #“서울의 공공미술 너무 볼품없다”

보는 이들에게 헛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이 풍경은 덴마크 출신 미카엘 엘름그린(Michael Elmgreen·58)과 노르웨이 출신의 잉가 드라그셋(Ingar Dragset·50)이 함께 만든 설치 작품이었다. 이후에도 이들의 독특한 작업은 계속됐다. 2016년엔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미국 뉴욕의 도심 한가운데 록펠러센터 광장에 9m짜리 파란 욕조를 세운 이들은 이 작품에 ‘반 고흐의 귀’란 제목을 붙여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적응하는 인간’=이번엔 서울이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이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들이 정성스레 만든 ‘엉뚱한 것들’을 가져다 놓았다. 아스팔트를 직사각형의 캔버스 형태로 제작해 실제 도로 표식에 쓰이는 흰색 페인팅으로 그림을 그려 전시장 벽에 건 것이다. 전시장 한가운데에 표지판도 세웠다. 스테인리스 표지판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아무 내용이 없다. 이들은 왜 이런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것일까. 전시 개막에 맞춰 한국을 찾은 이들을 만나봤다.

스텐인리스로 제작한 교통 표지판. [사진 국제갤러리]

스텐인리스로 제작한 교통 표지판. [사진 국제갤러리]

아스팔트 도로를 뚝 떼어온 듯하다.
“작품이 ‘레디메이드’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도로에서 막 떼어온 것은 아니다(웃음). 처음부터 기획하고 우리가 직접 만들었다. 현실에 있는 것과 많이 닮았지만, 살짝 비튼 거다.”
왜 차선과 표지판을 소재로 택했나.
“이것들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국제 언어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런 것들이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과 속도까지 삶을 깊숙이 통제하고 있다.” 이들은 “‘어댑테이션(Adaptation·적응)’이 우리가 요즘 하는 연작 제목이면서 이번 전시 제목”이라며 “우리가 적응해온 환경을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표지판에 내용이 없으면 사람들은 길을 잃을텐데.
“그것(길을 잃는 것)은 중요하다. 예술은 길을 잃기에 아주 좋은 장소다. 우리는 항상 ‘해야 할 일’을 하고,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하지만 예술은 다르다. 언뜻 의미 없어 보이지만, 예술은 우리의 열망과 두려움, 판단 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돌아보게 한다.”

◆‘나에게 빠진 인간들’=K2 전시장에서 이들은 조금 더 다채로운 소재로 현대 사회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풀어놓았다. ‘원형의 바’도 그중 하나다. 언뜻 보면 흔히 보는 바(bar)의 형상이지만, 안으로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막혀 있다. 현대사회의 소외와 공동체, 소속감, 무력감 등의 이슈를 냉소적인 유머로 풀어내는 그들의 관점이 읽히는 대목이다.

이 바(bar)엔 입구도 출고도 없는데.
“바로 십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바에서 만나고 소통했다. 그런데 요즘엔 모두 휴대폰과 SNS에 빠져 이런 공간은 줄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셀카’(Selfie)를 찍으며 자기에만 빠져 있다. 잘 보면 알겠지만, 이 바의 맥주 탭은 바깥쪽에 있고 손님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사람들을 연결해주던 곳이 이젠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것들을 엉뚱한 맥락에 놓으며 작업하고 있는데.
“너무나 많은 정보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시각 정보가 너무 많으니 누구도 그것을 제대로 돌아볼 기회가 없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씩 다시 끄집어내고 재발견하게 하고 싶었다. 사막에 가져다 놓은 프라다 매장도, 록펠러센터의 욕조도 그런 의미였다.”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각기 시인과 연극인을 꿈꾸다 만나 1995년 퍼포먼스로 창작 활동을 시작해 20여 년간 작업을 함께 해왔다. 2002년 독일 내 가장 권위 있는 미술상인 함부르크 반 호프상을 수상했으며, 그 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과 뉴욕 록펠러 센터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주목받았다.

공공미술 얘기가 나오자 엘름그린이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는데 해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내 말을 무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면서 “난 서울을 사랑한다. 서울은 정말 흥미롭고 멋진 도시다. 그런데 정말이지 끔찍한(horrible) 공공미술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좋은 작품들도 섞여 있지만, 나쁜 것들이 너무 많아 좋은 작품들이 묻히는 것 같아 아쉽다. 나쁜 공공미술 작품은 그 자체로 공해가 될 수 있다”면서 “내가 서울시장이라면 서울 공공예술의 80%는 철수를 고려해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시는 4월 28일까지.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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