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진보 넘나든 판결 미국 사회 '캐스팅 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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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법원이 과거엔 산드라 데이 오코너의 대법원이었다면 지금은 앤서니 케네디의 대법원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2일 "주요 심리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이 케네디(70.사진) 대법관의 손에 달려 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로이터통신도 "케네디가 오코너처럼 '캐스팅 보터(찬반이 팽팽히 맞설 때 결정권을 가진 사람)' 역할을 하고 있고, 그래서 대법원은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법관 9명의 이념성향을 따지면 보수(5명)가 진보(4명)보다 우세하다. 지난해 사망한 윌리엄 렌퀴스트 전 대법원장 후임에 보수주의자인 존 로버츠 당시 대법관이 임명됐고, 올 1월 사임한 중도 성향의 오코너(여) 전 대법관의 빈자리 역시 보수파인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1988년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대법관으로 임명한 케네디도 보수파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는 낙태와 동성애의 권리를 인정하는 등 사안에 따라 진보의 편에 섰다.

쿠바 관타나모 미군 수용소의 군사위원회에 대한 대법원 심리에서도 그는 진보파의 손을 들어줬다. 테러 용의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명령으로 설치된 군사위원회에 대해 대법원이 최근 "행정권 남용으로 위헌"이라고 판결한 건 그가 진보 진영에 가담한 결과다.

조지타운대 분석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대법원에서 찬성 5표로 판결이 내려진 심리 사건은 모두 17개다. 이 중 케네디가 찬성표를 던진 경우가 12개로 가장 많았다. 이는 그의 선택에 따라 심리사건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걸 뜻한다. 그가 찬성표를 던진 것 중 6건은 보수진영, 4건은 진보 측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었다.

경찰이 피의자의 집을 압수수색할 때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가 입수한 증거도 법적 효력이 있다는 지난달의 대법원 판결은 보수의 승리다. 케네디는 이때 보수 쪽에 섰다.

반면 케네디는 지난달 유죄가 확정된 사형수에 대해 사법사상 처음으로 재심 기회를 부여한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진보 진영의 박수를 받았다. 20년 전 성폭행과 살인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기결수가 당시엔 유죄 여부를 판가름하는 데 쓰이지 않았던 유전자(DNA) 검사 결과를 증거로 제출하며 재심을 요구한 데 대해 케네디는 '일리가 있다'고 봤다.

그런 케네디가 더욱 주목받는 건 앞으로도 보수.진보 진영의 희비를 가를 안건이 대법원에 적잖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7월부터 3개월 동안 여름 휴회기간을 보낸 뒤 10월부터 다시 활동하는 대법원은 부분출산 낙태 금지 연방법의 위헌 여부 등을 심리할 예정이다. 부분출산 낙태란 6개월 이상 된 태아의 신체 일부를 산모의 몸 밖으로 끌어낸 뒤 아기를 지우는 걸 뜻한다.

민주당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2000년 대법원은 네브래스카주의 부분출산 낙태 금지법을 5 대 4로 위헌이라고 판결했으나 2003년 부시 행정부는 그걸 연방법으로 부활시켰다. 스탠퍼드 법대와 하버드대 법과대학원을 나온 케네디는 그동안 낙태권을 옹호했으나 2000년 판결에 대해선 비판해 왔다. 따라서 진보 진영엔 비상이 걸린 상태지만 보수 측도 양쪽을 넘나드는 케네디를 자기편이라고 100%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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