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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쌍둥이' 김치녀≠김치남…잇따르는 ‘여가부 책자’ 논란

중앙일보

입력

성평등 관련 이미지 [연합뉴스]

성평등 관련 이미지 [연합뉴스]

‘김치녀는 혐오 표현 O, 김치남은 혐오 표현 X’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 599명 중 여성이 18명인 이유는? 수상자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남성이기 때문’

최근 여성가족부가 펴낸 성평등 관련 책자에서 논란이 된 대목이다. 여가부는 지난 4일 전국 시ㆍ도교육청에 209쪽 분량의 ‘초중고 성평등 교수ㆍ학습 지도안 사례집’을 배포했다. 교육청에서 각 학교로 배포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이 공개되면서 온라인 등에서 시끌벅적하다. 양성평등이 중요한 가치인 것은 맞지만 정부기관에서 비(非)전문적인 표현들과 주관적 해석으로 오히려 성편견과 성갈등을 심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일각에서 나온다.

사례집은 가정과 사회, 또래집단에서 발생하는 성차별을 인지하고 성평등 사회를 만들자는 내용을 담았다. 노동시장과 대중 미디어에서 발생하는 성차별 문제, 여성할당제, 성폭력 예방 등을 주제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적절히 교육하도록 안내하는 방식이다.

취지는 좋았지만 일부 내용은 논란을 피해 가지 못했다. 대표적인 것이 ‘혐오표현’ 부분이다. 사례집은 ‘여성운전자, 김치녀’ 등을 대표적 혐오표현으로 언급했지만, ‘남성운전자, 김치남’은 혐오표현이 아니라고 적었다. 그 이유에 대해선 “남성과 같은 다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은 성립하기 어렵다. 남성들은 소수자들처럼 차별받아온 ‘과거’와 차별받고 있는 ‘현재’와 차별받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라는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저서(『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 저)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현재 혐오표현을 O,X로 분류한 이 표는 책자에서 삭제된 상태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해당 부분을 지적한 뒤 여가부에서 삭제했다”고 밝혔다.

초중고 성평등 교수학습 지도안 사례집에 게재됐다가 삭제된 내용. [하태경 의원 페이스북]

초중고 성평등 교수학습 지도안 사례집에 게재됐다가 삭제된 내용. [하태경 의원 페이스북]

‘역대 노벨과학상 수상자의 성비 알아보기’라는 부분도 논란이 됐다. 이 장은 교사가 성차별 이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학생에게 바람직한 답변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 599명 중 여성 수상자가 18명인 이유는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수상자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남성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답변이 달리는 식이다. 남성 노벨상 수상자들이 과학적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도 남성이란 이유로 특혜를 받았다고 학생들이 인식할 여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회사원 이원재(32)씨는 “성평등 교육은 찬성하지만 책자 내용은 일반 시각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네티즌들이 주장할법한 내용이 정부 책자에서 적혀 있는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서연(23)씨는 “김치녀, 김치남이라는 표현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혐오표현일 수 있다는 점을 학생들에게 알리는 게 진정한 성평등 교육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3월 12일 여성가족부가 배포한 '초중고 성평등 교수학습 지도안 사례집'의 일부 내용. [여성가족부 자료]

3월 12일 여성가족부가 배포한 '초중고 성평등 교수학습 지도안 사례집'의 일부 내용. [여성가족부 자료]

현직 교사들 사이에서도 일부 표현이 적절치 못했다는 반응이 나온다. 서울지역에서 고교 교사로 일하는 양모(31)씨는 “성평등 이슈는 교사들이 늘 염두에 두는 부분이고 교육도 필요하지만 책자의 노벨상 부분이나, 혐오표현 부분은 편향적인 관점에서 쓰였다고 생각한다”며 “일부 동료 교사들도 문제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반면 일부 표현에 문제가 있는 건 맞지만 여가부에서 책자를 펴내 성평등 인식 확산에 나서는 것은 긍정적이라는 반응도 있다. 은평구의 초등학교 담임교사 최모씨는 “아이들에게 성차별이 무엇이고 성평등이 무엇인지 교육을 하고 싶어도 적절한 매뉴얼이 없어 곤란한 일이 많았다”며 “일부 논란의 부분만 수정한다면 여가부에서 배포한 책자가 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세경 전교조 여성위원장은 “일부 검수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지만 책자 자체에 정치적 공세를 하는 건 맞지 않다”며 “성평등이나 여성혐오 등 이슈에 대한 적절한 교육 매뉴얼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사례집 발간에 참여한 여가부 관계자는 “해당 책자는 1년 넘게 준비한 것으로 현장 이야기를 반영하기 위해 현직 교사들도 제작에 참여했다”며 “내용을 수정할 지 여부는 정해진 것이 없지만 지적이 들어온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노벨상 관련 대목에 대해선 “해당 장(챕터) 뒷부분에 나오는 유리천장 문제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표현으로 전체 맥락을 보면 '수상자를 결정하는 사람이 남자라서 남성 수상자가 많다'고 단정 지은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책자가 오히려 성갈등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선 “전혀 그럴 의도가 없다. 성갈등 조장은 여가부의 업무와 완전 배치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여성부가 2월 12일 배포한 '성평등 방송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개정판의 일부 내용. [PDF 캡쳐]

여성부가 2월 12일 배포한 '성평등 방송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개정판의 일부 내용. [PDF 캡쳐]

여가부에서 낸 책자가 논란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12일 여가부는 방송국 등에 ‘성평등 방송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개정판을 배포했는데 ‘비슷한 외모의 여성 출연자가 과도한 비율로 출연하지 않도록 한다’는 문구가 포함돼 ‘검열 논란’이 일었다. 여가부는 이에 대해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한 일부 표현, 인용 사례는 수정 또는 삭제해 본래 취지가 정확히 전달되도록 개선하겠다”며 “다만 프로그램 제작 원칙을 안내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 맞고 내용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손국희ㆍ김정연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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