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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동지들 전적비나 세웠으면…|군번없는 「화무결사대」12명 6·25격전지 「큰골」찾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바로 이 자리였지…』노병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25일 낮 강원도춘성군북산면오항리 큰골-.
인적없는 산기슭에 선노병 12명은 39년전 이일대를 근거지로 용맹을 떨친 화무결사대원들.
이제 대장 박승무씨는68세, 연락책이었던 이정섭씨는 고희, 그리고 18세의 학생으로 결사대에 가담했던 막내 박석헌씨도 회갑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때는 험산준령을 넘나들며 인민군을 혼내주던 기백이 넘치는 젊은이들이었다. 비록 군번없는 병사들이었으나 투혼은 정규군을 능가, 조국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던졌었다.
군번없이 싸워 수백명의 적을 사살하고 30여명을 포로로 한 이들의 공은 여지껏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여기에 대한 섭섭함 때문이 아니라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스러져간 1백여 동지에 대한 추념과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다.
『국군이 철수하고 난 50년 7월13일, 가족을 찾으러 왔다가 북괴내무서원에게 붙잡혔지요.
이들이 다른 반공청년을 잡으려 할때 새끼줄을 끊고 산속으로 달아났지요』 한동안 우거진 수풀만을 응시하던 박승무씨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산중에서 만난 청년 30여명을 규합, 화무결사대를 조직했다고 했다.
『본래 이곳이 38선부근으로 일찍이 공산당의 도발을 경험했었기 때문에 반공정신 하나는 투철했었지요』
박씨는 6·25 발발전 미군사령부에서 대북공작을 담당하던 군사정보전문가였다. 『38선부근 동굴에서 수류탄 10여발과 받침없는 60㎜박격포, 로킷포, 약간의 포탄을 찾아냈지요. 이때부터 20일간 기초군사훈련과 통신방법을 익히게 했습니다. 총은 한자루도 없었지만』 이때 8연대 낙오병 이유선이등중사(63)가 합류했다. 그는 M1소총을 갖고 있어 일행을 용기백배하게 했다.
결사대는 우선 오항리출신 좌익인 김인수·오수찬을 사살하고 상주하던 북괴병들과 내무서원세포원들을 차례로 제거해 나갔다.
『8월8일에는 민청위원장과 내무서원을 처단하고 나니 저들 누구도 얼씬하지 못했지요』 마침 수청골에 사는 박원배노인이 추녀밑에 감춰뒀던 M1소총 4정과 실탄 1백여발을 내놓아 무장이 강화됐다.
이즈음 반공청년 20여명이 결사대에 합류했으나 대원은 4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벌써 10여명이 사망했기 때문이었다.『변활석대원의 경찰보고를 받고 북괴패잔병을 기습, 30명을 몰살시키고 소총 30정 노획했습니다.
아무튼 6사단이 춘천을 탈환하던 10월4일까지 1백여명을 사살하고 30명을 포로로 잡았지요』
결사대는 그후 국군부대에 합류, 원산까지 진격했다고 했다. 한창때는1백50명까지 불어났으나 젊은이를 현지 입대시키다보니 나이먹은 40여명만 끝까지 함께 행동했다.
결사대는 그후 금화로나와 치안을 맡았다가 52년4월에 해체됐다.
이같은 박씨의 증언은 거의 그대로 국방부전사편찬위의 야사에 실려있으며 편찬위는 고증이 되는대로 정사에 포함시키고 보훈하기 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다.
대장 박씨는 공을 내세우고 싶지 않아 지금껏 별다른 모임도 없이 지내왔으나 앞으로 숨진 동지를 위해 전적비라도 세우고 추념행사를 갖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춘성군내인남면가정리에서도 유증상(77)·유혜상(64) 씨등「반공공작산악대」 대원 10여명이 조촐한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마을과 조국을 지키다 스러져간 동료들을 찾아 애도하고 「이념의 희생양」으로 숨져간「적」의 명복도 빌었다. 산악대는 한말의병장 유린석의사의 후손들과 인근마을청년등 80여명으로 구성돼 잔당소탕과 치안확보에 큰공을 세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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