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여성 수퍼 히어로가 존재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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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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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최초’를 내세우는 뉴스를 접할 때면 감탄만 아니라 종종 한숨이 나온다. 해당 분야가 이제껏 여성에게 금단의 영역이었다는 얘기인 데다, ‘최초의 여성’이란 명예가 굴레가 될 수도 있어서다. ‘나는 나’로 족한데 여성이라서 더 관심을 받는 것도, 여성이니까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겪는 것도 반갑지만은 않은 이중잣대다.

‘캡틴 마블’에 반신반의했던 것도 그래서다. 미국 영화사 마블 최초로 여성 수퍼 히어로를 단독 주인공 삼은 영화다. ‘어벤져스’시리즈를 비롯한 마블 영화는 개봉 때마다 흥행독주를 벌였으니 이번에도 기세가 대단하리란 건 쉬운 예상이었다. 하지만 족보는 달라도 DC코믹스 출신의 ‘원더 우먼’ 같은 여성 수퍼 히어로 영화가 없었던 게 아니다. 마블 자체 기준으로 ‘최초’을 강조하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 설득당했다. 영화 속 캡틴 마블이 절세미인도, 천재 과학자도, 고귀한 혈통도 아니라는 것부터 신선했다. 주인공은 공군 조종사가 되려는 여성을 비웃는 1990년대 미국에서 조종사가 되려고 분투하다가 우연히 엄청난 초능력을 갖게 된 여성이다.

영화몽상 3/12

영화몽상 3/12

어찌나 엄청난지 두 팔이 묶여 있어도 단숨에 적들을 제압하고도 남는다. 왜 장차 우주를 구할 핵심 인물인지 단박에 보여준다. 구구절절 존재의 증명이 필요 없다. 그 자신이 “내가 왜 너에게 증명해야 하지”라고 당차게 말하는 대로다. 개봉 전 논란에 비하면 이 영화에서 급진적인 페미니즘 서사를 찾아보긴 힘들다. 캡틴 마블은 ‘왜 나여야 하나’ 논쟁하는 대신 존재 자체로 인정투쟁을 훌쩍 넘어 새로운 여성 수퍼 히어로의 쾌감을 안겨준다.

판타지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리는 없지만, 상상력의 지평은 바꿀 수 있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강조했듯 허구의 픽션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인류가 생물학적 반경을 넘어 광범위한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데 중심 역할을 해왔다. 그 픽션이 종교적 신화든, 자유주의 같은 이념이든 말이다.

마블은 지난해 ‘블랙 팬서’의 흑인, 이번 ‘캡틴 마블’의 여성에 이어 다종다양한 수퍼 히어로를 등장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마블 영화가 공략하는 전 세계 관객이 기존의 수퍼 히어로 이상으로 다종다양하기 때문이다. 마블의 우주가 계속 커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후남 대중문화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