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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역사청산, 친일로 재미 본 세력 정조준

중앙일보

입력

중국의 친일 청산은 비교적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어쨌든 친일행위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권력을 누렸던 이들은 대부분 목숨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버젓이 정재계에서 한 자리 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당시 국민당은 친일반역자를 어떻게 단죄했을까?

친일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누가 친일반역자인가?’ 에 대한 정의가 분명해야 한다. 중국에서는 친일반역자를 ‘한간’이라고 부르는데, ‘한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처벌의 대상과 범위가 달라진다.

일제가 둥베이 지역에 세운 만주국의 황제가 된 푸이ⓒ바이두백과

일제가 둥베이 지역에 세운 만주국의 황제가 된 푸이ⓒ바이두백과

국민당은 일본의 항복 이후 약 3개월이 지난 1945년 11월 23일, <한간을 처리하는 조건과 조례>를 내놓았다.이 조례에서의 한간의 조건은 11개로 구성됐다. 정리하면, 처음에 한간은 ‘괴뢰 정부 혹은 단체 등 조직에 참여한 사람’으로만 한정됐다. 괴뢰 조직에 가담하지 않으면서 친일 행위에 협조했다면 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벌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일전쟁은 중화민족의 존망의 위기였다. 그만큼 일제에 치열하게 맞선 자들도, 철저하게 부역한 자들도 많았다는 의미다. 겉핥기식 허술한 한간 청산 방안에 대해, 여론의 반발은 거셀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민당은 첫 조례가 나온 한 달 후, 정부조직 외에 친일의 ‘행위’가 드러날 수 있는 교육, 문화, 선전기관, 금융기관 등 민간기관기간으로도 범주를 확대하는 조례를 추가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실제로 처벌된 대상은 괴뢰 정부 고위직에, 장기간 재직한 인물 정도였다.

이렇듯 국민당의 한간 처벌은 당과 정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비교적 제한적인 성격을 띈다. 이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고부터, 한간에 대한 처벌 규정이 전시라는 특수 상황에서 군법에 의한 처벌로만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일전쟁이 진행되면서 국민당 지역 각지에 대중적인 한간 방지 단체들, 민간의 움직임이 존재했다.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만행 ⓒ바이두백과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만행 ⓒ바이두백과

그러나 친일반역자 처벌에 대한 대국민적 여론이 형성되었음에도, 한간 죄상에 대한 조사와 처벌은 사법기관만이 책임을 맡았다. 일반 대중들은 한간을 고발하는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에 그쳤다. 심지어 국민정부는 1946년 “인민 또는 단체의 한간 고발은 1946년 12월 31일 이전을 시한으로 한다. 이 기간을 넘어 고발되는 자는 검찰관이 심의하지 않는다”고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조례에 따라 한간으로 규정된 괴뢰 정부의 공무원들조차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고, 공소시효 만료로 기소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전후 국민당에 의한 한간 처벌은 대체로 1947년 10월, 주요 한간에 대한 사법적 처벌이 일단락되면서 종결된다. 중일전쟁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14년 전쟁’으로 보고있는데, 그에 대한 단죄를 약 1년도 되지 않아 사실상 끝내버린 셈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간이라는 명목으로,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는 1946년 국공내전이 전면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국민당 정부가 친일부역자 처벌 문제를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왜 국민당은 소극적, 제한적으로 친일파를 처단할 수 밖에 없었을까.

국민당은 한간에 대한 처벌보다는, 중일전쟁이 종결된 후 국공간의 내전을 대비하는 데 더욱 힘썼기 때문이다.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전면전을 수행하던 국민당 군대는 후방의 괴뢰정부,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신속하게 복귀하기 어려웠다. 중일전쟁에서 후방을 맡았던 중공군이 국민당군보다 먼저 화중, 화베이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게 된다면, 국민당 향후 집권에 크나큰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국민당은 괴뢰정부의 인사를 회유하고, 괴뢰군을 국민당 군으로 편입시켜 이후 중공군에 대항할 세력을 불리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들 ‘한간 군대’를 공산당에 대항하고 해당 지역의 치안을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1940년 대륙 내,외에서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던 범위(분홍색, 주황색으로 색칠된 부분)ⓒ바이두백과

1940년 대륙 내,외에서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던 범위(분홍색, 주황색으로 색칠된 부분)ⓒ바이두백과

중일전쟁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친일 청산에 대한 조례가 나온 것은 이들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확보한 이후, 여론에 따라 법적 절차가 논의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민당의 한간 처벌 범위는 협소했기 때문에, 국민당의 치안 유지에 협조하거나 공산당 토벌에 동원되었던 한간들은 이후 한간 재판에서 유공자라는 이유로 감형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산당의 방식은 달랐을까?

중국 공산당의 한간에 대한 정의와 처벌 방식은 국민당과 사뭇 달랐다. 결론적으로 공산당에서의 한간의 의미는 국민당보다 훨씬 폭넓은 범위에서 정의되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 촘촘하게 한간을 추려낼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공산당의 정의한 한간은 사법적 판결 이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현지에서 한간이라 여겨지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범위에서였기 때문이다. 관직 유무와 상관 없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으로 인정된다면, 중공 해방구 안에서는 모두 한간이 됐다.

‘한간과 지주의 사회계급적 기초가 동일하다... 그들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화중 지역의 중공 문건 중 하나-

국민당의 한간 청산이 형식적이라 느껴질 만큼 단기간에, 협소한 범위에서 진행된 것과는 달리 공산당의 한간 청산은 계급 투쟁과 연결되어 진행됐다. 국민당이 정의한 한간의 범위는 일반적인 의미의 친일 부역자뿐만 아니라 반공파, 악덕 권력자, 지주들도 포함되었다. ‘농민계급의 적’을 모두 한간으로 취급하면서 계급투쟁과 연계시킨 것이다. 공산당에게 한간 청산은 기존 권력구조의 전복이자, 군중을 동원하고 계몽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한간의 처벌을 권력기구와 제도, 규정에 따라 진행했던 것이 아니라 민중 운동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공산당은 대중에게 지탄받던 한간들을 대중 스스로 체포하는 것을 용인하고, 적극 격려했다. 또한 재판정은 판결에서 대중의 의견과 감정을 적극 반영했는데, 이른바 ‘공심(공개심판)’이라 불렸던 인민재판이다.

...등 10여명은 연명으로 반역자 요석구가 몰래 일본 특무 및 헌병과 내통하여 여기저기 도박장을 열고, 특무와 떠돌이들을 이용해 항일지사를 해치고, 무고한 민중 수백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피비린내 나는 사실들을 고발했다. 군중들은 그 격분의 소리들을 듣고 “그를 총살시켜라!”, “마땅히 총살시켜야 한다”고 성난 목소리를 연발했다. 쑹쟝성(현 무단쟝) 주석 펑중윈은 인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반역자의 사형을 판결하였다.  

-10만명이 운집한 동북 하얼빈시의 공심, 해방일보 1946.7.18자 보도-

결론적으로 중국의 한간 청산은 국공의 대립이라는 상황 속에서, 각기 가진 정치적 입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국민당 정부와 한간들은 ‘공산당 타도’라는 같은 입장에 섰고, 권력기관의 절차를 통해 한간들을 심판대에 올렸기에 친일파 청산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이러한 한간 청산의 불완전성은 결과적으로 국민당 집권의 정당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민중 참여 중심이었던 공산당의 한간 청산 또한 한계가 있다. 공산당은 친일부역자 뿐만 아니라 농민 계급의 적 또한 한간 범주에 포함시킴으로써, 친일 청산을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이 실시했던 인민재판도 친일행위의 경중이나 증거여부와는 상관없이, 대중 정서와 공산당의 이익에 좌우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인적 차원에서 동정을 산 이용가치가 없는 한간이나, 공산당의 관점에서 유용성을 지닌 한간들은 때론 관대한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한간 군인 또는 기술자들이 그 대상 중 하나였는데, 이후 발발할 국공 전쟁에서 쓸만한 아군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한간들이 일신의 안위는 보존했더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였지, 사회적인 지위나 권력은 모두 내어놓아야 했다. 또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도 이후 중공정권 하에 다시 체포되어 처벌 혹은 재교육을 피할 수 없었다.

 중국 전승절 70주년이었던 2015년, 난징대학살기념관에서 연설하는 시진핑주석ⓒ바이두백과

중국 전승절 70주년이었던 2015년, 난징대학살기념관에서 연설하는 시진핑주석ⓒ바이두백과

그래서 중국의 친일청산이 완벽했다 할 수는 없지만, 역사를 통해 중국인들에겐 확실한 교훈을 줬다.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자들은 그로 인해 얻은 부귀영화를 대대손손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3. 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까지도 대한민국의 친일반역자 청산과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발굴, 포상은 현재 진행형인 듯 하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의 역사를 잊은 것인가, 아니면 너무 늦어버린 것일까.

참고자료 : 중국의 친일 한간 청산 일고 - 사법적 처벌과 대중운동을 통한 청산,  2006, 박상수

차이나랩 조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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