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제물건만 보면 무조건 ″팔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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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개방과 개혁의 바람을 가장 쉽게 느낄수 있는 곳은 암시장과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공연장뿐이다.』모스크바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지 횡단취재하는 도중 숱하게 들어온 말이다.
외국인의 눈에 보이는 소련의 특징적인 현상은 외제물건을 구입하러 호텔에 몰려드는 러시아인들, 서양음악에 빠져있는 젊은이들, 부족한 물건을 사기위해 항상 줄서기를 귀찮아하지않는 주부들의 모습이라고 할수있다.
하바로프스크 인투리스트호텔 지하에 있는 외화전용 바. 이곳에선 웬만한 호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검은 캐비어에서부터 온갖 종류의 고급안주, 하이네켄·퇴벤브로이 맥주, 보트카등을 팔고 있다.
물론 통용되는 화페는 달러나 엔화·마르크화등 외화뿐이고 루블로는 아무리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맥주 한모금 마실 수가 없다.
외국인이 다른 곳에서는 구할수 없는 검은 캐비어나 하이네껜 맥주를 마시다보면 희한한 경험을 하기 일쑤다.
외국물건에 군침을 흘리는 소련인들의 물건 좀 나누어 쓰자는 공세가 짜증스러울 정도다.
하바로프스크같은 곳에서는 피우려고 테이블위에 내놓은 말버러등 서양담배까지도 자신에게 팔라며 접근해 『팔아라』『팔 물건이 아니라 내가 쓸 것이다』『당신은 또 사면되지만 우리한테는 안팔지 않느냐. 그러니 나한테 팔고 또 사라』 며 승강이를 벌이기까지 했다.
루블화로는 이러한 제품을 구입하기 어려운 반면 시중에서는 시가의 몇배로까지 통용되고 때로는 화페이상의 기능을 하기때문에 외국물건을 보면 거의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물건을 외국인들로부터 구입해 다시 러시아인들에게 되팔아 매매차익을 노리는 것이다.
이르쿠츠크에서 취재진을 잡고 물건판매를 요구했던 한 러시아인은 기자가 차고 있던 시계를 가리켜『팔 물건이 아니다』고 했더니 『돈이부족하냐』 며 본격적인 흥정을 걸어오기도 했다.

<″한국 어째 잘사느냐">
많은 러시아인들은 「고르바초프」가 좋은 물건, 부족한 물건을 많이 공급하고 돈은 있어도 물건을 사기가 어러운 상황을 개선시키겠다고 한지도 벌써 4년이 넘었는데 바뀐 것이 없다고 불평했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한 기자는 아예 『비전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할정도였다. 그는 『지난 올림픽때 서울을 보니 너무나 물건이 많고 잘살던데 왜 북한은 같은 한국사람들의 나라인데 그렇게 못살고 남한은 잘살게 됐느냐』고 물어왔다. 그리고는『정말 우리(소련)가 나아지고 있는 거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현재 소련에선 상황은 나아지지않고 소련에 부족한 물건들이 외국에는 많으며 상대적으로 못산다는 생각만이 확산되어 불만이 대단하다고 했다.
취재진을 안내했던 「세르게이」「벅토르」「블라소프」기자등 많은 지식인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코페라치야(공동조합)나 조인트 벤처가 아직까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불만이 생겨난다고 했다.

<공동조합 사재기앞장>
즉 많은 코페라치야가 생겨나 그곳에선 외화로밖에 살수없던 물건이나 서비스를 공급하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그러한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오히려 코페라치야에서 양질의 물건을 적시에 공급하기 위해 각종물건을 매점매석해 가뜩이나 부족한 물자사정을 악화시키는가 하면 지나치게 비싼 가격으로 인플레를 유발시킨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이러한 코페라치야를 습격, 방화하는 사태까지도 생겨났다.
실제로 코페라치야 종사자들의 수입은 대단해 빈부격차를 유발시킨다는 비난도 일고있다.
노보시비르스크아 처음으로 개설되었던 코페라치야인 유즈나야 쿠흐냐의 주인 「루벤· 발렌」씨는 『현재 개업 2주년을 맞았는데 처음 3개월만에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1만루블을 다 갚았고 지금까지 총2만6천루블의 순익을 올렸다』고 자랑했다.
그는 자신의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의 임금도 소련 노동자의 평균임금인 1백70∼2백루블보다 2배이상인 5백루블이라고 했다.
이와같이 코페라치야 종사자들의 수입이 높아 주변의 불만이 고조되자 소련당국은 자본주의적인 생산성과 서비스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주의 이념에 철저한 당성을 가진 전문적인 사업가들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비스·생산성 눈떠>
현재 이와같은 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단체는 공산청년동맹인 콤소몰이다. 기관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점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젊은층의 언더그라운드 문화활동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 「사회창출재단」을 만들었고 1956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세계청년학생축전때 여행과 숙박업무를 맡았던 콤소몰내의 한 조직이었던 스푸트니크는 독립여행사로 분리되었다.
스푸트니크의 「체르노프」씨는 『지금까지 소련의 관광산업은 인투리스트가 독점해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리도 국영호텔 체인을 이용, 해외학생들의 학술관광 등 각종관광산업에 뛰어든다. 우리는 조직과 인원이 콤소몰 50%·전문 비즈니스맨 50%로 되어있다』고 밝혔다.
또 「사회창출재단」의 「메즈드리코프」씨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고있는 지하문화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록카페·재즈카페등을 개설하고 각종 공연을 주선하며 악기 등 공연에 필요한 장비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사회창출재단」』이라고 밝혔다.

<한국계 록그룹 인기>
그러면서 「메즈드리코프」씨는 현재 소련에는 전문적인 밴드나 뮤지션들의 인기가 대단한데 이중에는 한국계 「빅토르·최」가 이끄는 록그룹「키노」(영화)와「브레즈네프」시대 반체제 시인으로서 최근에 해금된 「유리·금」등도 있다고 했다. 소련이 이와같이 공산당의 전위조직인 콤소몰등을 비즈니스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데에는 최근의 개방과 대외합작 시대에 공산당이 전문지식과 비즈니스 감각을 결여할 경우 역할이 점점 감소되어 주도권을 상실한다는 위기감도 작용하고 있다.
하바로프스크 콤소몰 책임자였고 지금은 스푸트니크의 극동담당 책임자인 「페티소프」씨는 『콤소몰 내에서도 여러가지 의견이 표출되고 있으나 시대감각에 맞는 전문적 지식을 갖춰 페레스트로이카의 전위가 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했다.
시베리아 지역에는 이와같이 보다 많은 돈을 벌겠다는 개인들이 만든 코페라치야와 사회주의 체제의 근간을 유지하며 경제부흥에 앞장서겠다는 콤소몰원이 참여한 기업체, 문화적으로 점점 대담해지는 젊은이들, 외국과의 합작을 강조하는 정책당국자들의 열망이 어우러져 강력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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