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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72년 전 우려, 현실이 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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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호 31면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원래 전쟁을 염두에 두었다. 행여 전쟁까진 아니더라도 이에 버금가는 긴급상황을 머릿속에 그렸다.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자유교역 운운은 현실성이 없다는 데 모두 수긍하였다. 2차 대전 직후인 1947년 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가 출범하며 “국가안보 (National Security)” 예외조항은 이렇게 들어온다.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을 이유로 상품 수입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47년 GATT의 ‘국가안보’ 조항 #상품 수입 제한 가능하도록 예외 둬 #화석화됐던 조항이 미국에서 부활 #국가안보를 상품교역에 확대 적용 #WTO·FTA 합의 무의미해질 수도 #수입 자동차 추가관세 여부가 고비

흥미로운 점은 이미 1947년 당시 이 조항의 남용 문제가 심각히 논의되었다는 사실이다. 터무니없는 국가안보 연관 주장 가능성을 진작에 염려하였다. 여러 국가, 특히 당시 미국 협상대표가 이 가능성을 지적한다. 모두들 공감하며 ‘진정한’ 국가 긴급상황만이 그 대상인 것으로 이해하고 조문을 만든다. 잘 정리되었다.

이러한 이해에 터잡아 GATT, WTO(세계무역기구) 체제를 거치며 이 조항은 거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이런저런 맥락에서 간혹 언급되었으나 화석화된 조항에 가까웠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발동이 어렵다고 보았다. 이를 본 따 모든 자유무역협정 (FTA)에도 유사한 조항들이 들어간다. 역시 별문제 없었다.

화석에서 공룡을 꺼낸 것은 지난해 미국이 수입 철강에 25% 추가관세를 부과하면서다.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을 이유로 관세를 부과하였다. 이제 동일한 조치가 자동차에 대하여도 적용될지 곧 결정된다. 미 상무부가 진행 중인 자동차 국가안보 위협 조사 결과가 2월 17일 나올 예정이다. 두말할 것 없이 자동차에 대한 관세 부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자동차 수출국이 지금 워싱턴을 쳐다보고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은 과연 ‘국가안보’의 영역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여부다. 지난해 철강 관세 부과에 나타난 미국의 입장은 국가안보는 전쟁·긴급상황뿐 아니라 상업적 부분도 포함한다고 새긴다. 이렇게 보면 수입상품과 국내상품 간 시장에서의 경쟁관계도 이 영역에 들어온다. 국가안보 예외조항의 새로운 발견이자, 발상의 전환이다. 아무도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어떤 물건도 좋다. 그 상품을 생산하는 업종 중 국가안보와 연결되지 않은 것이 있을까. 항공기 산업은 민간항공기와 군용항공기를 동시에 제작한다. 조선업도 마찬가지다. 최첨단 이지스함과 크루즈 유람선을 함께 제작한다. 반도체는 어떤가. 현대 전자전의 모든 핵심부품에 수없이 들어간다. 신발회사가 군화를 만들고, 식품회사가 전투식량도 생산한다. 그리고 지금 초미의 관심사인 자동차 제작업체는 군용차량도 만든다. 결국 군사활동과 관련된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안보 문제를 따지면 대부분의 상품이 이에 해당한다. 72년 전 바로 이러한 부분이 논의되었고, 이러한 해석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런데 지난해 철강 관세 부과 시 미국 입장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 기초한다. 곧 나올 자동차에 대한 관세 부과는 이를 거듭 확인하게 된다. 국가안보를 이렇게 바라보면 결국 WTO와 FTA를 통한 국가 간 모든 합의 내용이 무의미해진다. ‘국가안보’라는 말 한마디로 추가관세 부과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합의 내용에 대한 일종의 ‘자동정지’ 조항에 가깝다. 상대방을 허탈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한국산 자동차가 면제될지 여부다. 면제된다면 그야말로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일각에 따르면 25% 관세 부과 시 우리 자동차의 대미수출이 20% 가까이 줄어든다. 큰일이다. 일단 좋은 결과를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

더욱 큰 우려는 그 이후 전개될 상황이다. 자동차 관세 부과는 이제 국가안보 문제가 국제교역의 상수(常數)가 됨을 의미한다. 어렵사리 맞춘 교역의 균형을 순식간에 좌지우지한다는 뜻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철강, 자동차에 이어 다른 품목으로 전이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싸우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또 다른 걱정은 다른 나라들도 이 논리를 따라갈 가능성이다. 굳이 골치 아프고 복잡한 통상협정 조문을 쫓아갈 필요 없이 국가안보라는 ‘전가의 보도’를 내세운 수입제한이 너무나 쉽다. 당장 지난해 미국의 철강 관세 부과 이후 EU(유럽연합), 캐나다, 터키가 각각 세이프가드 조치를 발동하였다. 그래도 체면이 있어 아직은 ‘국가안보’까지 가지는 않고 세이프가드라는 옷을 입혔으나 이제 국가안보 자체를 원용할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 누구에게나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이제 국가안보 문제가 교역을 넘어 투자, 환경, 사법협력 등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동안 국가안보 예외조항은 수많은 조약에 일종의 보험약관같이 기계적으로 들어가면서도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모두들 유심히 살펴본다. 국가안보라는 주문(呪文)이 가지고 오는 새로운 가능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2월 17일 자동차 조사 결과는 여러모로 중요한 고비다. 72년 전의 우려가 현실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그 당시 합리적인 목소리와 공동체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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