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도 「만만디정신」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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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서경』(서경)에 정귀유항(정귀유항)이란 말이 있다. 즉 정치에는 항구여일(항구여일)한 것이 귀중한 것이지, 일시적인 편의주의는 옳지 않다는 뜻이다. 다른 정부 부처는 차치하고 문교정책 하나만 보아도 항구적인 방침아래 시행된 것이 별로 없고 모두 실험단계에 머물러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우리정치는 이랬다 저랬다 갈팡질팡하는 편의주의가 보편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의 정책입안자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1백년 2백년 앞을 바라보며 항구여일한 깊은 철학과 고도의 정책을 수립해야지, 국민을 시험대상으로 삼으러 해서는 곤란한 일이다. 서한(서한)의 공수(공수)라는 사람이 발해(발해)의 치안관으로 부임했을 때 황제에게 보낸 건언문(건언문) 가운데 「치난민여 치난승불가급야」(치난민여 치난승불가급야)라는 말이 있다.
즉 난민을 다스린다는 것은 마치 엉킨 노끈뭉치를 푸는 것과 같아서 급히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정부가 이 같은 고사를 알고 그대로 실행하였더라면 지금은 정치가 자기의 궤도를 한결 순조롭게 달리게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우리의 정치인들은 모든 일에 너무나 성미가 급하다. 요즘 같은 돌출시대에는 중국사람들이 잘 쓰는 처변불경(처변불경), 즉 변함을 겪어도 놀라지 않는다는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정신이 필요할 것 같다.
자기의 임기 중 모든 것을 단번에 성취하려고 하니 쌓인 적페가 하루 아침에 제거될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 인명살해가 나고 체포. 투옥이 빈번해지며 정치한다는 것이 자기 인기유지를 우선적으로 하는 형편이 되었다. 엉킨 실뭉치는 느슨한 자세로 한 올 두올 살피며 실마리를 찾아 풀어야 되는데 급히 서두르면 실을 끊고 자르고 하여 실뭉치는 쓸모 없이 되고 만다.
우리는 당면과제인 과감한 5공 비리의 청산, 광주 문제의 시원한 해결, 신중한 북방정책, 물가와 주택 문제, 교원 노조문제, 학원사태와 노사문제, 민주주의의 교육장인 지방자치제 실시 등 산적한 국사를 하나하나 서두르지 말고 온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깊은 철학을 배경으로 한 고도의 정치수완으로 풀어가야 할 것이다. 물길을 잡으려고 도리깨로 두들겨 패면 불꽃은 더욱 퍼져 나간다는 이치를 알고 국사를 퍼나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열망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하나 둘 다져나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현실은 얽힌 정치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다. 훌륭한 정치는 통치자가 있는지 없는지 국민이 몰라야 하는데 오늘의 상황은 국민들이 정치걱정을 하는 소리가 드높다. 이 모두정책의 단견과 불신에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
이제 정치인들은 난마(난마)같은 이 정국을 정심(정심)으로 엉킨 실뭉치를 푸는 지혜로 풀어나가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마리도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전직교장. 대구시 신암2동 485의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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