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응원, 새 한류 브랜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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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골, 골…. 16강 진출이 걸린 한국과 스위스의 월드컵 축구경기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스위스가 선취골을 넣자 안타까워하고 있다. 김태성 기자


응원자체가 축제
월드컵 16강엔 진출하지 못했지만 길거리 응원에선 승리했다.

총 486만 명(토고전 218만, 프랑스전 100만, 스위스전 168만 명)이 참여한 거리응원은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브랜드'로 떠올랐다. 각박한 일상생활에서의 일탈을 허용하는 '즐김의 마당'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렸지만 성숙된 시민의식을 보여준 '학습의 마당'이기도 했다.

◆ 즐김과 축제의 한마당으로 승화=2002년의 거리응원은 열성팬들이 주축이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는 경기보다 응원 자체가 거리응원의 목적이 됐다.

단순한 '축구 응원'이 아닌 즐기는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놀이와 재미, 몸짓(춤)과 응원가(음악)가 어우러진 또 다른 형태의 문화였다.

세 차례의 월드컵 조별리그 때 모인 인파는 축구 응원뿐 아니라 모임 자체를 만끽하려는 시민과 학생들이었다. 거리응원의 참가자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토고전 때 거리응원에 참가했던 회사원 이성민(28.여)씨는 "축구는 잘 몰라도 모여서 응원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신났다"고 말했다.

거리응원에서는 광화문 네거리를 누구나 마음껏 '점거'할 수 있었다. 얼굴에 페인트를 칠하고, 태극기로 옷을 만들어 입는 파격도 생소하지 않았다.

'월드컵 패션'이란 용어도 생겼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박수 치고 부둥켜안고 춤추는 것도 가능했다.

중앙대 신광영(사회학) 교수는 "거리응원에서는 자기표현에 대한 일상적인 통제가 무너지고 저마다 자유롭게 개성을 표출했다"며 "그동안 우리 사회에 없었던 축제의 장이 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일도 따라하기

◆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전국을 물들인 붉은 물결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외국인도 매료시켰다. 문화관광부에 따르면 월드컵 응원을 위한 '한국관광 상품'이 생겨 2500여 명의 외국인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제 거리응원은 해외로 전파됐다. 23일(현지시간) 스위스전이 벌어진 독일 현지에서 아들과 함께 한국 팀을 응원 나온 한 교민. [AFP=연합뉴스]

실제로 시청과 광화문에서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오~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외국인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야광 도깨비뿔을 머리에 쓰고 토고전 거리응원에 나선 한 캐나다인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같은 색깔 옷을 입고 응원하는 장면은 난생처음"이라며 감탄했다. 미국 LA 타임스는 "월드컵 응원에서는 한국이 당연히 우승감"이라고 보도했다.

거리응원은 개최국 독일에서도 그대로 재연됐다. 독일은 우리의 거리응원을 본떠 프랑크푸르트 등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도시마다 '팬 페스트(Fan Fest)' 광장을 만들어 거리응원을 펼쳤다. 2002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거리응원이 국제적인 응원 문화가 돼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시민의식 학습장

◆ 시민의식도 성장=13일의 첫 경기 토고전 때 문제가 됐던 거리응원의 무질서한 모습은 프랑스전(19일)부터 사라졌다. 토고전 직후 차량에 올라타 난동을 부리는 모습이나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는 사진 등이 인터넷에 올라오자 시민은 스스로 '부끄럽다' '자제하자'고 다짐했다. 프랑스전과 스위스전(25일) 응원 때는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줍는 등 확연히 달라졌다. 프랑스전 거리응원에 참가한 고등학생 이모(17)양은 "토고전 때 무질서한 모습을 보고 실망해 이번엔 뒤처리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쓰레기 봉투를 들고 청소에 나섰다. 토고전 응원 때 나타난 부작용이 오히려 시민의식이 성장하는 학습의 계기로 작용한 셈이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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