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영어 4등급이 서울대 합격…불거진 '영어 공부 무용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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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학 입학 예정인 재수생 임모(19·경기 김포시)씨는 대입 성공 비결이 “선택과 집중”이라고 했다. 지난해 재수를 시작하면서 영어에 투자하는 시간을 대폭 줄인 대신 국어와 수학·사회탐구에 집중한 것이다.

3등급이 성균관대 의예과 합격 #대학들 영어 반영 비율 크게 낮춰 #서울대는 1·9등급이 4점 차이 #학부모 “고교 영어수업 줄여라”

임씨는 “수능 영어 과목이 절대평가로 바뀌면서 90점만 넘으면 1등급을 받을 수 있고, 일부 대학에서는 영어 등급 간 점수 차가 크지 않아 시험을 못 봐도 크게 불리할 것 같지 않았다”며 “그 시간에 차라리 국·수·탐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임씨 뿐 아니라 수험생들 사이에서 ‘수능 영어 공부 무용론’이 확산하고 있다. 수능 영어영역의 평가방식이 지난 2018학년도부터 절대평가로 바뀐 게 가장 큰 이유다. 영역별로 상위 4%에 들어야 1등급을 부여하는 상대평가와 달리 절대평가는 100점 만점에 90점만 넘으면 누구나 1등급을 받을 수 있다. 실제 처음 절대평가가 실시된 2018학년도에는 영어 1등급 비율이 10.03%에 달했고, 불수능으로 불리는 2019학년도 수능에서도 5.3%가 1등급을 받았다.

정시에서 영어 반영 비중을 낮춘 대학들이 많아진 것도 ‘무용론’의 원인이다. 낮은 영어점수를 받고도 상위권 대학에 합격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올해 대입에서는 영어 4등급을 받은 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했다. 영어 4등급이 서울대에 합격한 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또 영어영역 3등급을 받고 성균관대 의예과와 중앙대 의학부에 합격하는 사례도 나왔다.

일반적으로 서울대 정시에 합격하려면 모든 영역 1등급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영어 4등급 합격이 가능해진 건 서울대가 영어 반영 비율을 대폭 낮췄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영어 등급 간 점수 차이가 0.5점밖에 나지 않아 최하위인 9등급을 받아도 4점만 감점된다. 수능 점수로 1등급(90~100점)과 4등급(60~69점)의 차이는 최대 40점이지만, 서울대 입시에서는 1.5점 차이로 좁혀지는 것이다.

영어 1등급이 아닌 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하는 일은 이제 더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종로학원하늘교육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수능 채점 결과와 표본 조사 자료 등을 바탕으로 서울대 정시 최초합격자 10명 중 4명은 영어 2등급 이하라고 분석했다. 영어 100점 만점에 80점대를 받아도 합격에 큰 어려움이 없다는 의미다. 고려대도 영어 2등급은 1점 감점하고 3등급부터는 2점씩 감점하는 식이라 비중이 크지 않다. 오종운 종로학원하늘교육 평가이사는 “고려대에서도 영어 2등급 이하 최초합격자 비율이 80%고, 그중 3등급 이하를 받은 학생도 약 20% 정도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학교와 학원에서는 영어 교육 비중이 줄어드는 추세다. 서울의 한 일반고 교사는 “학교에서 수능 대비 방과 후 수업을 개설할 때도 영어보다 국어와 수학에 더 주력한다”며 “영어 수업시간을 줄여달라고 항의하는 학부모도 있다”고 말했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영어 절대평가 이후 재수학원의 영어 수업시간도 기존 7~8시간에서 2~3시간으로 대폭 줄였다”며 “수험생들도 수능 영어는 굳이 사교육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민하 시대인재 평가이사는 “영어영역이 절대평가로 바뀌고, 낮은 점수를 받고 최상위권 대학에 합격하는 사례까지 등장하자 ‘영어는 안 해도 된다’고 인식하는 학생들이 늘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학력저하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서울대의 한 관계자는 “공대를 비롯해 원서를 사용하는 학과가 많은데, 영어 4등급을 받은 학생이 대학에 진학해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며 “사교육을 줄이려다 학생 실력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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