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문화」새롭게 태어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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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연이틀에 걸친 「광주10만집회」는 정연한 질서속에 평화시위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화염병·투석은 물론 단 한장의 유리창도 깨지지 않은채 끝난 광주집회는 이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더욱 많은 관심과 박수를 받았다.
서울에서도 학생들은 시청앞 집결이 원천봉쇄되자 밤늦게까지 도심 산발시위를 벌이면서 단한차례의 투석이나 경찰과 충돌없이 끝나 시민들을 최루탄으로부터 벗어날수 있게 했다.
많은 시민들은 『이번「5·18」집회가 새로운 시위문화 정착의 계기가 돼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광주집회>
「광주 민중항쟁」9주기를 맞은 광주에서는 17, 18일 이틀간 1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인가운데 전야제·추모행사등 각종집회가 열렸으나 질서정연한 평화시위로 시민·학생들의 성숙된 모습을 보여줬다.
18일 오전 광주시 망월동 5·18희생자묘역에서 추모행사를 마친 시민·학생들은 오후5시부터 전남도청앞 광장에서 「5월운동협의회」주최, 「5월항쟁계승 및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공동투쟁본부」주관으로 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궐기대회에는 13만여명(경찰추산 8만명)의 인파가 몰려 5·18행사로서는 최대인파를 기록했으며 광주사레지오고·광주상고생등 고교생 5백여명도 참석했다.
윤강옥5·18민중항쟁동지회장의 사회로 시작된 대회는 배종렬 5월투쟁공동본부장의 대회사, 「이철규군 고문살인 진상규명대책위」김현장위원장의 이군진상은 폐조작규탄,「남대협」의장 조정신군(24· 전남대총학생회장)의「5월에서 반미」란 연설로 이어졌다.
또 김병균목사 (5월투쟁공동본부장) 의 성명서채택·화형식으로 대회가 끝난후 시민·학생들은 횃불 1천여개를 앞세우고 도청앞에서 광주지검까지 4㎞의 가두횃불시위를 벌였으나 아무런 불상사나 충돌없이 오후11시쯤 해산했다.
광주시림동성당에서도 오후 4시·7시 두차례 9주기추모미사를 가진뒤 유동삼거리∼금남노∼도청앞까지 신부·수녀·신도등 5천여명이 질서정연하게 촛불시위를 벌였고 한빛교회에서는 오후3시 「5·18기념연합예배」를 올렸다.

<서울시위>
18일오후 서울시청앞에서 열릴 예정이던 서총련주최 「이철규군 고문살인진상 규명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자 학생 1천5백여명은 시내 곳곳에서 산발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일체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 않은채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면 자진해산, 서울시내에서 단 한차례의 최루탄도 발사되지 않았다.
경찰은 이날 학생 1천2백98명을 연행, 이중 3명만 즉심에 넘기고 모두 훈방했다. 이에앞서 오후1시부터 서울시내 33개 대학별로 열린 출정식에서도 경찰과의 충돌은 1건도 없었다.
외대생들은 관할청량리경찰서에 집회를 신고, 출정식후 청량리로터리까지 4㎞를 「노정권타도」를 외치며 평화가두 시위했으며 국민대에서는 「서민학련」소속학생들이 화염병투척을 주장, 화염병 30여개를 준비했다가 동료학생들의 야유와 만류로 형식적으로 3개만 던진후 자진해산했다.
이날 외대생들의 가두시위 허용은 지난 16, 17일 경기대·경희대에 이은 것으로 경찰은 『앞으로도 학생들이 평화가두시위를 사전신고할 경우 허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전대협의장 임종석군(22·한양대총학생회장) 은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이번 기회에 절실히 느꼈다』며 『앞으로 운동권 일부의 반발이 있더라도 비폭력평화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전국집회>
이날 전국2백34곳에서 학생·재야인사등 20여만명의 시위가 벌어졌으며 부산대등 16개대학생 1만8천여명이 시가행진을 벌였으나 경찰은 단한개의 최루탄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날 오후3시55분 민정당전북완주지구당이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5명이 던진 화염병에 유리창 4장이 깨졌을뿐 공공기관습격이나 건물피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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