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예비타당성 원칙까지 흔드는 현 정권의 ‘예산 짬짜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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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현 정부 들어 국가 재정을 특정 지역구에 끌어다 쓰려는 정치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지역이기주의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에 편승한 국회의원·지방단체장이 국민 세금을 쌈짓돈처럼 끌어 쓰면 국가 재정은 그리스·아르헨티나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바닥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는 1999년 예비타당성조사(예타)라는 안전장치를 도입했다. 총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면 ‘비용 대비 편익’이 1 이상 나와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국민 세금을 낭비하지 않고 재정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국민 세금 보호장치다.

여당·단체장 요구에 지역 대형사업 봇물 #‘기준 100배’ 5조원 예외 요구도 수두룩 #국민 세금 최후 보루 ‘예타’ 원칙 지켜야

그런데 이 원칙을 허물고 예타 면제를 요청하는 사업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예타 기준 500억원은 무시해도 좋다는 듯 지금 면제 요청이 들어와 있는 사업들 상당수가 사업비 1조원을 넘어선다. 박남춘 인천시장의 GTX-B 건설사업은 5조9000억원에 달하고, 김경수 경남지사의 김천-거제 남부내륙철도는 5조3000억원짜리 사업이다. 정부는 오는 29일 이들을 포함해 모두 33건의 예타 면제 사업을 심사해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지금 분위기로 봐선 문제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현 정부가 이런 요구에 적극 부응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회견에서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지역에 대규모 공공인프라 사업을 해야 되는데, 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은 어려움을 겪는다”면서 예타 면제 필요성을 지지했다. 엊그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예비타당성 자체를 합목적적으로 고치려고 정부와 협의하고 있다”며 예타 원칙 허물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이런 상황은 ‘나랏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국회의 밀담을 떠올리게 한다. 정부 돈은 국민이 땀 흘려 일해 벌어들여 낸 세금을 재원으로 모아둔 재정이다. 그런데 ‘공유지의 비극’이 도사린다. 정부가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써야 할 책무가 있지만 세금 낸 사람의 꼬리표가 없다 보니 정치인들이 지역구 관리를 위해 끌어다 쓰는 경우가 남발되고 있다는 얘기다. 4대 강 사업과 영암 F1 경기장도 각각 대통령 공약 사항과 지역 균형발전을 이유로 예타 면제를 받았다가 극심한 국론 분열과 예산 낭비 논란에 휩싸였다. 지금 집권세력은 야당 때는 이를 비판했지만 여당이 되자 정부와 짬짜미를 해 예타 허물기에 나서고 있다.

국가 균형발전을 반대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건전한 재정은 우리의 생명이라는 점을 한순간도 잊어선 안 된다. 김대중 정부가 풍전등화의 외환위기를 극복한 저력도 탄탄한 재정 덕분이었다. 그 중요성을 알기에 예타 제도를 도입해 지역이기주의와 포퓰리즘으로부터 재정 건전성을 지키도록 했다. 더구나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복지 예산이 국가 예산의 35%를 차지할 만큼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다 무분별한 지역사업까지 남발되면 재정 건전성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재정은 국민의 미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점에서 예타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