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서기」좀 잘 해봅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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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줄서기를 자주한다. 버스·택시 정류장에서, 기차·전철역에서, 극장매표구 앞에서 줄서기를 한다. 차선을 따라 달리는 차량들의 행렬 또한 줄서기의 일종이다.
보이는 줄만 줄은 아니다. 식당에서 도착순 또는 주문 순으로 음식을 기다렸다가 먹는 것도 줄서기며 입학시험에서 성적순으로 정원을 뽑는 것도 줄서기의 일종이다. 나아가서 각종 직장과 일터에서 입사 순 또는 실력에 따라 진급하고 출세하는 것도 줄서기며 일한 만큼 보수를 받고 그만큼 재산을 모아 남보다 잘 사는 것 또한 노력과 그 대가의 줄서기가 아니겠는가.
줄서기란 사회질서의 근본이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간이며 골격에 다름 아니다. 경쟁속의 질서, 질서속의 경쟁이 줄서기의 요체인 것이다. 줄서기를 잘못하여 줄이 흐트러지면 사회질서는 파괴되고 아울러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가 위기를 맞게된다.
누가 줄서기를 방해하는가. 먼저 줄서는 사람들의 잘못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자.
줄서기란 많은 사람이 선착순으로 공평하게 기회를 균분하기 위해 서로의 자유를 제약하는 제도다. 따라서 차례가 오기까지 참고 기다리는 자제와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 기다리는 것이 짜증스럽고 피곤하다 해서 아우성을 치고 소란을 떤다. 심지어는 줄에서 이탈해 새치기를 하거나 줄 자체를 흐트러뜨리고 저들 나름대로 새로운 줄을 만들어보려고 성급하게 덤비는 경우가 생기면 줄은 불안해지고 흔들려 자칫 혼란과 무질서에 빠질 위험성이 높아진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지난 60년 정초 서울역에서 수많은 귀성객들이 서로 열차에 먼저 타려고 일시에 몰려 계단을 달려 내려가다가 30여명이 압사한 참극의 교훈을 잊을 수 없다.
4·19이후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시에 폭발한 성급한 요구가 사회혼란을 빚고 마침내 5·16을 촉발시켰으며 10·26직후의 무질서가 5·17세력에 명분을 제공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실례도 있다. 한 목사의 섣부른 통일열망이 기존의 남북관계마저 더욱 냉각시키고 국가의 대 북방 정책 자체를 후퇴시켜버린 사실을 보고있지 않은가.
누가 줄서기를 훼방놓는가, 줄을 서는 목적 자체가 신뢰를 잃을 때 또한 줄서기는 흔들린다. 매표소에서 줄서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할 표를 엉뚱한 사람들에게 빼돌려 선착순 우대원칙이 무시됐을 때 줄서기는 무의미해지고 따라서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식당에서 도착과 주문순서가 지켜지지 않고, 시험성적이 무시된 채 합격자가 결정된다면, 조직의 인사가 원칙 없이 난맥상용 보인다면, 일한 만큼 보상받지 못하는데 날쌘 투기꾼은 부정한 한탕으로 삽시간에 졸부가 되는 풍토에서는 줄서기란 무의미하다. 작은 도둑은 죄값 이상의 벌을 받는데 큰 도둑은 대로를 활보하는 불공평 아래서는 줄서기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진다. 선량한 사람들의 줄서기를 망가뜨린 훼방꾼은 줄서기 관리를 잘못한 「주재자」 들일 수도 있다.
그때는 줄선 사람들의 분기를 막을 수가 없다. 줄선 사람들은 반칙자 들을 쓸어버리거나 규칙을 재정비토록 한다. 4·19에 의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10·26으로 유신체제가 끝장났으며 「6월 민주항쟁」에 의해 체육관 선거가 막을 내리고 6·29선언을 쟁취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국민들이 모두 불안하다고 한다. 4·19와 10·26직후 같다고 수군거린다.노사·학원분규가 계속되고 있다. 서민들의 생존권 주장도 뜨겁다.
그러나 동의대 참사를 계기로 학원과 노동현장의 분규가 대체로 이성과 평온을 회복해가는 양상이다. 마비됐던 학원이 정상화되고 있으며 노사분규도 합리적인 해결방안 모색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전대협이 화염병과 투석을 삼가겠다고 나섰다. 줄서는 쪽에서의 자제와 인내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듯하다. 잘만 하면 줄서기 정상적인 모양새를 갖출 것 같다.
우리가 참고 기다리며 줄을 서자는 것은 앞선 사람의 뒤통수나 멍청하게 바라보며 차례만 기다리자는 뜻은 아니다.
줄 밖에서 벌어지는 불법·비리 또는 부의나 편향에 대해서는 감시와 시정의 목청을 높여야하고, 다양한 목소리로 의견을 제시할 줄도 알고 있다. 이제 줄서기의 평온을 유지하고 혼란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지금부터 정치와 권력이 떠맡아야 할 몫이다.
줄서기의 신뢰를 의심케 했던 부분은 보완하고 수정해서 신뢰를 갖도록 해야한다. 5공 청산·광주문제해결 등 모든 소요와 분쟁의 근본적 요인과 쟁점들을 해결하고 매듭짓는 일을 정치인과 정부가 성실하게 서둘러야 한다. 정치가 폭을 넓히고 법과 행정이 엄정한 기준에 의해 집행된다는 국민들의 신뢰가 사회질서유지의 최우선적 선행조건이 아닌가.
『민주주의가 빠지기 쉬운 최대의 위험은 국민의 총명이 아니라 국민의 총명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고 한 「버트런드·러셀」의 지적은 음미해 볼만하다. 국민의 줄서기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주는 것이야말로 다시는 거리에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지 않게 하는 가장 확실하고 당당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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