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단풍나무 인터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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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깊은 산중에도 웬만하면 인터넷이 됩니다. 세상 만물이 하나의 그물로 짜여져 있다는 연기론의 인드라망(網)이 현실화된 셈이지요. 핸드폰과 더불어 인터넷은 이제 서로의 존재를 비춰보는 거울 같은 것. 하지만 유선 무선의 정보망이 제아무리 좋아도 자연의 인터넷 만큼이야 하겠습니까. 때가 되면 야생화들은 스팸 메일 없이도 일제히 피어납니다.

안부 메일을 못 받아도 소외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고,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입니다. 이따금 덕유산 소쩍새가 '번개'를 치면 지리산 소쩍이 그 소리를 받아 "야, 우리도 한번 뭉치자" 백운산 소쩍이에게 전하고요. 자연의 인터넷은 자살 사이트가 없는 정보화사회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지난 밤에는 피아골의 단풍나무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나, 절정이야, 혁명도 없이 희망도 없이 내 몸은 곧 절정이야'. 답장을 보내려고 자판을 칠 때마다 잎잎이 푸르던 날들이 붉게 물들고, 엔터키를 칠 때마다 성질 급한 낙엽들이 뛰어내립니다. 밤새 단풍나무 벗삼아 게임 '고스톱'을 치다보면 "야, 낙장불입이야 낙장불입!" 다투기도 하지요. 때이른 단풍잎 하나 주으려다 생각해보니, 인생이야말로 정말 낙장불입입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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