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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축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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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케피 블랑(Kepi blanc)'은 프랑스 외인부대의 애칭이다. 그들이 쓰는 하얀색 원통형 모자를 말한다. 프랑스 삼색기가 상징하는 '자유.평등.박애' 중 평등의 하얀색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만큼 국적이나 전력(前歷)을 가리지 않음은 물론 익명도 보장된다. 오로지 혹독한 선발 과정을 통과한 뒤 부대에 충성할 것만 맹세하면 된다. 출신이 어떻든 쓸모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얘기다. 역사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이 말하는 '평등적 개인주의'다.

프랑스의 이러한 경향은 문화예술계에서 두드러진다. 재능만 있으면 외국인이라도 작업실을 무상임대해 주고 보조금도 지급한다. 누구라도 프랑스에서 그림을 그리면 프랑스 화가란 얘기다. 귀화를 원하면 언제든 '비앙브뉘(Bienvenue.환영)'다.

이런 프랑스가 프랑스어권의 축구 천재들을 내버려둘 리 없다. 아프리카.아랍과 프랑스령 누벨칼레도니에서 선수들을 끌어 모았다. 그 힘으로 1998년 월드컵, 2000년 유럽컵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개인주의만큼이나 공화주의 전통을 중시하는 나라가 프랑스다. 공화국(La Republique)이란 단어가 프랑스(La France)와 동의어로 쓰일 정도다. 개인주의와 공화국 가치가 충돌하는 걸 막기 위해 프랑스가 발전시켜 온 공존의 원리가 바로 '톨레랑스'다. 여기에 재미난 일화가 있다.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알제리를 위해 자금 전달책 임무까지 자원했다. 명백한 반역행위였다. 그를 단죄해야 한다는 측근들의 주장에 드골 대통령은 손을 가로저었다. "놔두게, 그도 프랑스야."

98년 월드컵 당시 누벨칼레도니 출신 미드필더 크리스티앙 카랑뵈는 경기 시작 전 동료 선수들이 '라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부를 때 입을 굳게 다물었다. 조국의 독립을 원한다는 침묵 시위였다. 하지만 팀은 물론 프랑스 국민도 그를 욕하지 않았다. 국가도 못 부르는 게 무슨 프랑스 대표냐고 말하는 것은 장 마리 르펜 같은 극우파들뿐이었다. 카랑뵈는 프랑스를 위해 열심히 뛰었고 프랑스는 우승했다. 프랑스 대표팀을 두고 외인부대라는 비아냥이 많다. 말 그대로 그래서 모래알 조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축구를 위해 자신들의 공존원리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프랑스적 가치는 어쩌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고질인 지역 이기주의와 패거리 문화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축구장에서도 필요없는 게 맹목적 애국심이다.

이훈범 week&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