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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비운 짊어진 파란의 일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였던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30일 타계함으로써 정략결혼까지 해야했던 한일간 얼룩진 역사의 한 장이 조용히 막을 내렸다.
20세기 초 한일합방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회오리 속, 곤궁했던 해방 후 일본 생활, 귀국후 등의 시대를 가냘프지만 굳건히 자신의 삶을 지켜온 방자 여사의 일생은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평소 『나에게는 두개의 조국이 있다. 일본이 내게 육체를 주었다면 한국은 내게 영혼을 주었다. 세상을 뜨면 나의 제2의 조국인 한국땅, 영친왕 곁에 묻힐 것이다』고 얘기한 방자 여사는 이제 그의 뜻에 따라 영친왕묘소에 합장된다.
그는 1901년 11월 4일 「메이지」천황의 조카인 「나시모토」가 「모리마사」왕과 이탈리아대사를 지낸 「나베시마」후작의 딸인 「이쓰코」의 첫딸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 8월, 왕족의 여름휴가지 오이소에서 그는 어느 날 아침 무심코 펼친 조간신문에서 이은 왕세자와 나란히 실린 자신의 사진을 보고 약혼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당시 그는 다른 귀족의 딸들처럼 황궁내 학습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 후 70여년간 그는 몰락한 조선왕가의 비운의 역사와 시련 속에서 살아왔다. 일본 군벌들에 의해 합방한 한국과 일본을 굳건히 결속시킨다는 명분아래 강요된 그의 결혼은 애초부터 무리가 많았다.
그때 이미 이은공은 민영돈 전 동래부사의 딸 민갑완 처녀와 혼약한 터였고 방자 여사 또한 지난 1월 작고한 일본천황의 비로 물망에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1916년에 맺어진 혼약은 시아버지인 고종의 승하 등으로 20년에야 혼인을 치렀고, 그 후 22년의 첫 내한에서는 누군가의 독살로 첫아들 진을 잃는 슬픔을 당해야 했다.
45년 일본에서 해방을 맞은 이은공 일가는 무국적자로 일정한 수입 없이 별장의 커튼을 갈라 옷을 해 입어야 하는 등 곤궁하게 보냈다.
63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환국한 이들 일가는 창덕궁 악선재로 들어갔으나 그때 이미 이은공은 의식불명으로 귀국즉시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66년 방자 여사는 이은공의 평소 소망에 따라 심신장애자를 돕기 위한 사단법인 자항회를 설립했고, 67년에는 이은공의 호를 딴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을 운영해왔다.
자항회 산하에는 정박아학교인 자혜학교가, 명휘원산하에는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직업교육학교인 명혜학교가 있다. 방자 여사는 이 기관의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노령임에도 자신이 직접 구운 칠보제품과 손수 쓰고 그린 서화를 판매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이은공의 유일한 혈육인 외아들 구씨(57)는 첫 부인인 미국태생 「줄리아」씨와 이혼했고 사업에도 실패, 일본에 머물러 왔다.
인생의 온갖 시련 속에서도 늘 밝은 미소를 잃지 않던 방자 여사는 『한 아내로서 자신의 삶은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그는 생전에 서울시 문화상, 적십자박애장금장, 5.16민족상, 국민훈장모란장, 소파상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지나온 세월』(74년), 『조선왕조궁중의상』(87년)등이 있다. <박금옥·안남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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