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실용주의적 데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20만명이나 「자발적」으로 집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으나 큰 충돌없이 한 고비를 넘긴 22일의 북경 천안문광장 데모는 한국데모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중국적 특성을 보여주었다.
시위대 2O만명이라면 굉장한 규모인데도 그들의 요구조건들 중 어느 하나 제대로 관철되지 못했음에도 그 엄청난 물리력을 스스로 포기한 듯 맥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는 당과 민중간의 대립의식이 그렇게 치열하지 않다는 뜻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군중을 조직하고 끌어가는 중심지도부가 없는데다 오랫동안 통제에 길들여져 서로를 경계하는 불신풍조와 중국특유의 현실주의적 국민성이 발휘된 것으로도 분석된다.
21일 야간시위를 주도한 한 학생지도자는 『민주와 자유는 귀중한 것이지만 한꺼번에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급격한 요구는 오히려 당과 정부를 자극해 우리 뜻이 좌절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민주화라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시위가 갖는 한계를 분명히 했다.
또 21일 야간시위는 「침묵시위」였으며 중남해에서는 경찰 약1개분대씩이 줄을 지어 시위군중들을 헤치고 이동을 해도 시위대는 몇 마디의 야유밖에는 없었다.
장례식 전후 천안문에서 연좌농성중이던 일부 학생들이 당국과 학생대표간 협상결렬소식에 흥분해 장례식장인 인민대회당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학생대표의 「호소」로 물러난 것이나, 진압경찰들이 끝까지 곤봉하나 없는 비무장상태를 유지한 것도 충돌은 상호간에 이익이 안 된다는 「실용주의적」판단때문이었다.
2O만의 「민의」가 빚어내던 열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천안문광장에서 기자는 얇은 양철냄비처럼 쉽게 달아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것 같은 최근 서울의 갖가지 「화끈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북경에서】
박병석<홍콩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