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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인싸]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통과됐지만 냉소적인 2030

중앙일보

입력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총을 든 강도가 들이닥쳤어요. 도와달라고 소리치니까 나라에서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핵무기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다’라고 하는 느낌이에요.”

직장인 장 모(29) 씨는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평소 직장 상사로부터 회식자리에선 술 강요를, 회사에선 부당한 야근 지시 등을 받아 괴로움을 호소하던 장 씨. 이런 ‘갑질’을 막을 법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냉소적인 이유는 뭘까요.

“라면 끓여달라” “주차 대신해달라” 

직원에 대한 폭행과 폭언이 보도되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왼쪽)과 이 전 이사장의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뉴스1]

직원에 대한 폭행과 폭언이 보도되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왼쪽)과 이 전 이사장의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뉴스1]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직장에서 지위나 관계우위 등을 이용해 신체적·정신적·정서적 고통을 주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입니다. 이 법에 따르면 직장 내에서 괴롭힘 발생 시 사용자(고용인)는 사실 확인 조사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또 피해자는 근무 장소를 변경하거나 유급휴가를 줘야 하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규정도 의무 사항입니다.

이 법이 통과되면서, 그동안 물리적 폭력을 동반하지 않아 처벌이 어려웠던 욕설이나 폭언, 혹은 ‘라면을 끓여 달라’, ‘주차를 대신해달라’는 등의 갑질도 고용노동부 조사가 가능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명확한 법적 정의가 처음 내려졌다는 게 유의미합니다. 여야도 오랜만에 뜻을 모았습니다. 올해 9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두 건 발의됐고, 이를 병합한 대안이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직장인 70%가 직장 내 괴롭힘 피해 경험

직장 갑질은 2014년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으로 공론화됐고 특히 최근 양진호 회장의 갑질이 크게 부각되면서 입법도 급물살을 탔습니다.

직장 갑질 피해자 상담과 법률 지원을 하는 ‘직장 갑질 119’에 따르면, 올해 7월 1일부터 12월 22일까지 이메일 등으로 제보된 괴롭힘만 1403건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례 중에는 ▲중국집에서 회식이 끝나고 짜장면을 먹은 그릇에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게 하고 ▲‘내가 결혼만 안 했으면 너 어떻게 해보고 싶다’와 같은 성희롱과 이후 신고 과정에서 무고죄 협박 ▲상사 흰머리를 뽑게 하기 등이 있었습니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 직장생활 경험이 있는 만 20~64세 남녀 1500명 중 73.7%가 직장 내 괴롭힘 피해 경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폭행과 강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된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지난달 7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으로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폭행과 강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된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지난달 7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으로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직장 내 괴롭힘을 증명하라니, 어떻게?

하지만 2030 사이에선 “직장에서 누가 날 괴롭힌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느냐”는 불만이 나옵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상사가 갑질한다고 회사에 고발하면 ‘별종’으로 찍힐 것 같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직장인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에는 지난달 “팀장이랑 싸웠더니 나보고 나가라고 한다. 사직서 안 쓰면 컴퓨터를 다 뽑아버린다고 한다. 영상 찍겠다고 했더니 ‘죽여버린다’고 한다. 노동청에 전화했더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괴롭힘 방지법'이 국회 법사위를 통과한 26일에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사수가 나한테 일을 다 시키고 서류에 자기 도장 찍어서 결재받는다. 퇴근 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해서 일을 시킨다. 사장한테 말했더니 ‘너도 잘못이 있다’고 한다”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게시물에는 “퇴사가 답”이라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결국 통과된 법이 “내 직장생활을 크게 바꿀 것 같지는 않다”는 회의적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법의 두 가지 한계를 지적합니다. 첫째, 가해자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다는 점입니다. 박 위원은 “처벌 조항이 명확하지 않아 법이 선언적인 수준에 그칠 우려가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언어폭력·성희롱 등은 상황을 명백히 입증할 방법이 쉽지 않습니다. 올 2월 서울아산병원에서 일하던 고(故) 박선욱 간호사가 태움(간호사 집단 내 괴롭힘)을 못 견디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경찰은 “병원 내 폭행, 모욕, 가혹 행위가 있었다는 구체적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사건을 종결했습니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노동조합이 제작해 간호사들에게 배포한 태움방지 배지. 김정연 기자

신촌 세브란스병원 노동조합이 제작해 간호사들에게 배포한 태움방지 배지. 김정연 기자

두 번째는 비정규직 등 불안정 고용 노동자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박 위원은 "비정규직 직원의 경우, 갑질을 신고할 때 사실상 '잘릴 각오'를 해야 하지 않겠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물론 법상엔 ‘사용자가 신고자에 대해 해고나 불리한 처우를 할 경우에는 3년 이하 징역, 3000만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만, 전문가들은 사문화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합니다.

물론 법이 만능키가 될 순 없겠죠. 어쩌면 법은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일지 모릅니다. 부조리에 쉽사리 외면하지 않는 2030의 부릅뜬 눈이야말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을 지켜낼 가장 강력한 우군일 겁니다.

성지원 기자 sung.ji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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