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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는 장애인 비하 발언···'엄지장갑'으로 불러 주세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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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기자와 만난 원종건(25)씨. 김정연 기자

지난 5일 기자와 만난 원종건(25)씨. 김정연 기자

몇 년 전부터 SNS에는 ‘느낌표 소년 현재는…’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주기적으로 떠돌아 다닌다. 2005년 MBC <느낌표>에서 진행한 ‘눈을 떠요!’ 코너의 캡쳐 사진과 어느 청년의 해외 봉사활동 사진이다. 그 ‘느낌표 소년’이 ‘엄지장갑’에 관한 책(『원종건의 엄지장갑 이야기』)를 들고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이베이코리아 소셜임팩트팀 원종건(25) 매니저다.

이베이코리아 원종건씨의 프로젝트 #장애인 비하 벙어리장갑 용어 바꾸자

후천적 청각장애‧시각장애 가진 어머니... ‘느낌표’ 이후 시력 되찾아

원씨는 청각장애인에게서 태어난 비(非)청각장애인이다. 이런 사람들을 CODA(Child of Deaf Adults)라고 부른다. 원씨의 어머니는 학창시절 고열로 청력을 잃고, 서른이  넘어 영양결핍 등으로 각막 혼탁을 겪으며 앞을 거의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던 중 2005년 <느낌표>를 통해 각막이식 수술을 받고 시력을 되찾았다.

2016년 9월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마지막 학기를 다니던 원씨는 취업준비에 매진하는 대신 ‘그간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친구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해 물었고, 공감하는 친구들이 모여 ‘설리번’ 팀이 만들어졌다.

2016년 진행했던 &#39;엄지장갑 프로젝트&#39; 크라우드 펀딩.

2016년 진행했던 &#39;엄지장갑 프로젝트&#39; 크라우드 펀딩.

2016년 11월 30일 목표금액 300만원으로 ‘엄지장갑 프로젝트’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 ‘벙어리장갑’이라는 단어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이 들어 있으니, ‘엄지 장갑’으로 부르자는 내용이었다. 청각장애인 어머니를 둔 원씨 귀에 ‘벙어리’란 단어가 늘 걸렸던 데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사진 원종건씨 제공]

[사진 원종건씨 제공]

후원자들에게 답례품으로 줄 ‘엄지장갑’도 직접 만들었다. 장갑 손등엔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뜻하는 수어(手語) 그림을 실로 새겼다. ‘귀를 기울이는’ 손모양을 하면 수평선이 만들어지도록 손바닥에는 두 색을 대각선으로 짜 넣었다.

하루만에 1000만원이 모였다. 원씨가 예상하지 못했던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두 달간의 펀딩으로 1043명의 후원자가 2500만원 이상을 모아줬다. 언론의 관심도 쏟아졌고,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했다.

2016년 다음 스토리펀딩 후원자들에게 리워드로 준비했던 &#39;엄지장갑&#39; 실물. 손등에는 &#39;감사합니다&#39; &#39;사랑합니다&#39;를 뜻하는 수어를 새겼다. [사진 원종건씨 제공]

2016년 다음 스토리펀딩 후원자들에게 리워드로 준비했던 &#39;엄지장갑&#39; 실물. 손등에는 &#39;감사합니다&#39; &#39;사랑합니다&#39;를 뜻하는 수어를 새겼다. [사진 원종건씨 제공]

이후 원씨는 차츰 변화를 느꼈다. “2017년 5,6월쯤 야구 사진 기사들에 ‘엄지장갑 착용하고 있는 박성민 선수’ 등 설명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최근엔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엄지장갑’을 검색하면 많이 보인다”고 뿌듯해했다.

최근엔 ‘손모아장갑’등 다른 이름도 생겨났다. 친구들은 원씨에게 장난처럼 “‘엄지장갑’ 단어 저작권 주장해야하는 것 아니냐” “손모아장갑 사용하는 쪽과 합의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기도 했다. 원씨는 “손모아장갑이든 뭐든 상관없다. ‘벙어리’ 단어를 안 쓰게만 하는 게 내 목적”이라며 “언어는 주인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현재진행형 ‘수어통역사 연결 앱’…'1일1수어' 프로젝트도

사실 ‘엄지장갑 프로젝트’는 과거완료형이다. 그가 요즘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수어통역사 연결 앱’이다. ‘이어(Ear)'라는 가칭을 붙였다. ‘귀’와 ‘잇다’의 뜻을 동시에 담았다. 각 구청마다 있는 수어통역서비스를 좀 더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카카오 택시’와 비슷한 원리로 예약시스템을 만들었다. 내년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원씨는 “입사 뒤 어머니를 돌보지 못하니 수어통역사를 불러야 하는데 어머니가 직접 부르기 너무 불편해 시작했다"며 “청각장애인들은 다른 장애인들에 비해 스마트폰 사용률이 현저히 높은데 앱은 그걸 못따라가고 있다. 구청마다 이미 있는 서비스를 편리하게 연결해주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39;1일 1수화&#39; 페이스북 캡쳐

&#39;1일 1수화&#39; 페이스북 캡쳐

원씨는 페이스북 페이에 동영상 ‘1일 1수화’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대중에 쉽게 다가가는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현재 시즌2를 끝내고 잠시 휴식기를 갖고 있다.  내년에는 ‘1일 1수어’로 이름 바꿔 시즌3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인터뷰를 마치기 전 수어 배우기에 관심이 있다는 기자에게 원씨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등 간단한 인사말을 알려줬다. 원 씨는 귀에 쏙쏙 들리게 설명을 잘 했다. 직접 출연하는 게 어떠냐는 제의에 그는 “그것도 고민 중이다”며 웃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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