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상상력과 정치적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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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46년 9월5일 오후 한 대의 영구차가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남로당 책임자 박헌영은 이날 한 평 남짓한 검은 관속에 누워 시체를 가장한 채 홍천을 거쳐 38선을 넘었다. 그가 해주에 근거지를 정한 뒤 카프문학의 지도자였고 조선문학자대회의 의장이었던 시인 임화를 다시 월북시켜 문화단체 총 연맹을 결성, 서울의 좌익문인들을 뒤에서 조종하게 된다.
40대 후반 「인공」시절을 살았던 세대라면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으로 시작되는 『인민항쟁가』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김일성이 두고두고 격찬해 마지않았던 임화의 이 전투적 장편 시는 김순남이 곡을 붙여 북의 수십만 젊은이들을 피 비린내나는 「조국의 통일전쟁」으로 몰아가는데 공헌했다.
전선으로 떠나는 젊은이마다 임화의 시 『바람이여 전하라』 『너 어느 곳에 있느냐』 등을 외면서 죽음으로 죽음으로 몰려갔다.
좌익 이데올로기에 심취되면서 일제식민지 정책에 맞서 항쟁했고 해방과 더불어·공산주의 국가 설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임화가 1953년 8월6일 어처구니없게도「미제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북의 하늘에서 총살형으로 숨졌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 만주에서 남편의 처형소식을 둘은 임화의 아내 지하련이 평양으로 달려왔을 때는 시체마저 찾을 길 없었다. 실성한 지하련은 치마끈을 풀어헤친 채 울며불며 평양시내를 헤맸다고 한다. 이것이 임화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통곡이었다.
어디 임화뿐인가. 한설야·이기영·김남천·송영, 그리고 최승희 등 수많은 예술가가 남북 이데올로기 대결의 속죄양으로 숨져가지 않았는가.
그로부터 42년의 세월이 지나 한 명의 시인 목사와 작가가 북으로 떠났다.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나부끼는 일이라고/…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서울역이나 부산 광주 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 구만….
시인 문 익환 목사가 북으로 떠나기 전 영감처럼 떠오른 시상을 적었다는 그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내용일부다.
시적 상상력은 낮과 방을 바꿀 수 있고 맨발로 바위를 차 부술 수 있고 엄연한 분단의 현실인 휴전선을 없는 양 만들 수 있다. 분단의 고정관념을 넘어 서울역에서 평양행 기차표를 달라고 주장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충분히 신선하다. 그만큼 통일에 대한 그의 열망은 드높다.
그러나 상상력으로 끝나야할 시인의 열망이 어느 날 느닷없이 평양의 김일성과 감격적인 포옹으로 현실화되었다. 시적 상상력이 정치적 현실로 바뀌어 졌을 때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마치 40년 전의 극좌 극우의 대립을 연상시키는 살벌한 이념논쟁이 재현되면서 모든 사회적 갈등이 남북의 갈등, 좌우익의 갈등구조로 증폭되어 모여지고 있음을 확연히 보게된다.
오기만 해봐라 몽땅 잡아넣어 극좌의 싹을 밟아버리겠다고 벼르는 쪽이 있는가하면, 통일을 한 단계 앞당겼으니 거국적으로 환영해야한다는 억지로 서로 맞선다.
시인 자신도 놀라고 있듯, 그의 방북은 현실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채 민주화의 방향을 남북대결구도로 환치시킴으로써 극좌와 극우의 대결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점에선 적어도 한 시인의 순진한 행동이 통일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던 남쪽의 분위기를 열 걸음 뒤로 가게 만든 결과적 책임으로 남는다.
시적 상상의 세계와 정치적 현실간에는 이렇듯 큰 차이를 남기게된다.
프랑스인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나치즘과 대항해서 혁혁한 레지스탕스운동을 벌였던 시인 「아라공」은 전쟁이 끝나며 공산주의자로 변신한다. 종전과 함께 도전과 투쟁의 대상이 사라지면서 공산주의적 인간형이라는 새로운 투쟁논리를 찾게된다. 레지스탕스의 순교정신과 도덕성을 내세운 그는 자신보다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 만인의 행복과 안녕을 회구 하는 구도자적 위치에 자신을 설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시인의 맑은 정신으로 승화될 때 시인은 위대성을 남기지만 그것이 공산당원이라는 정치적 현실로 드러날 때 「아라공」이나 임화의 시는 빛을 잃었다. 맑은 정신의 시 세계가 아닌 투쟁을 위한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신과 5공의 억압 밑에서 수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민주화투쟁을 위해 몸을 바쳤다. 문 목사 또한 맑은 시정신과 드높은 도덕심으로 어두운 시대를 비추는 찬연한 등불이었다.
그러나 이제 억압의 실체가 사라져가고 진정한 민주화의 길을 열어야할 시점에서 민주화의 맺힌 고리를 우리 사회내부에서 찾지 않고 북의 김일성과의 대좌를 통해 얻으려 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공산주의 또한 민주화를 역행하는 또 다른 형태의 독재체제인 한 통일의 고리가 민주화의 고리일 수는 없다.
통일이 우리의 공동선이라는 염원만으로 북의 주도에 의해 우리 삶의 현장을 뿌리째 뽑힐 수 없다는 것이 남쪽의 강한 현실논리다.
남과 북의 공통목표는 독재와 권위에 대한 도전과 극복을 통해서 서로의 민주화를 획득할 때 남북의 맺힌 고리는 의외로 쉽게 풀려질 수 있다. ·
북쪽의 의도에 따라 남쪽의 민주화가 해결될 수 없듯 남쪽의 논리로 북의 민주화를 강요할 수도 없다. 민주화의 길을 남북구조로 파악할 때 극좌와 극우라는 4O여 년에 걸친 피비린내는 우리의 강토에서 씻어질 수 없음을 임화의 현실참여와 문 목사의 방북에서 우리는 새삼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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