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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신주기’ 포토라인 없어지나 '인권보호' 전주지검의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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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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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라인 세우기, 피의 사실 흘리기, 수갑 채우기 등 검찰 수사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재수(60) 전 국군기무사령관의 자살로 촉발됐다. 이 전 사령관은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불법 사찰을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로 검찰 수사를 받다 지난 7일 투신해 숨졌다.

전주지검 ‘피의자 인권 보호’ 실험 #‘극단 선택’ 이재수 전 사령관 부담? #최규호 전 교육감 형제 비공개 소환 #수갑 채우기, 수사 내용 유출 중단 … #일각선 “국민들 알 권리 위해 필요”

전주지검이 피의자를 압박하는 수사 관행을 깨는 실험에 나섰다. 검찰 안팎에서는 “정도(正道)로 가고 있다”는 기대와 “검찰 전체가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엇갈린다.

전주지검은 최근 송하진(66) 전북도지사와 김승환(65) 전북도교육감, 최규호(71)·최규성(68) 형제 등을 잇달아 불구속기소 했다. 각각 공직선거법 위반 및 특가법상 뇌물 혐의 등이다. 모두 거물급 인사여서 사건의 파장이 컸다.

특히 8년 넘게 행방이 묘연했던 최규호 전 전북도교육감 검거는 전주지검 현 수뇌부의 치적으로 꼽힌다. 그간 전주를 거친 검사장 10명이 놓친 도주범을 잡아서다. 검찰은 지난달 6일 인천의 한 죽집에서 최 전 교육감을 체포했다. 2010년 9월 12일 잠적한 지 8년 2개월 만이다.

검찰은 친동생인 최규성 전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이 최 전 교육감의 도피를 도운 ‘몸통’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더불어민주당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최 전 사장은 검찰 수사망이 좁혀 오자 최근 농어촌공사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전주지검은 이른바 대어(大魚)를 낚고도 최씨 형제를 포토라인(기자들이 합의한 사진 촬영 지역)에 세우지 않았다. 피의자 소환도 비공개로 했다. 송 지사와 김 교육감도 카메라 세례를 피했다. 당초 기자들은 공개 소환을 요구했다. 국민의 알 권리와 뉴스가치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전주지검은 “유죄가 확정되기 전 피의자를 카메라 앞에 세워 망신을 주는 건 부적절하다”며 거절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우위에 둔 것이다.

전주지검은 지난 7일 최 전 사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관정(54·사법연수원 26기) 차장검사는 “전형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를 저버린 범죄”라며 구속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영장이 기각되자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영장을 다시 청구하지 않았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이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재판의 독립을 훼손한 반헌법적 중범죄 전모의 규명을 막는 행위”라며 반발한 모습과 대조된다.

전주지검의 이런 움직임은 지난 6월 윤웅걸(52·사법연수원 21기) 검사장 부임 이후 생긴 변화다. 윤 지검장은 지난달 검찰 내부 통신망(이프로스)에 ‘검찰개혁론’이란 글을 올려 법무부의 사법제도 개혁을 정면으로 비판한 인물이다.

윤 지검장은 18일 “검찰이 이렇게 가야 하나 걱정된다”고 말했다. 피의 사실을 일부러 언론에 흘려 군중의 분노를 등에 업고 수사의 동력으로 삼는 행태도 비판했다. 그는 이 전 사령관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운 일”이라면서도 말을 아꼈다. 대신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할 때 제 발로 검찰에 들어오는 피의자는 절대 수갑을 채우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선진국에서는 검찰청사 안에 포토라인을 만들어 소환자를 세우거나,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가리기 위한 재판에 검찰 직원이 수갑을 채워 피의자를 데려 가는 모습을 생중계하는 건 극히 드물다. ‘인격 살인’을 막기 위해서다.

윤 지검장은 “수사 대상자가 여당이든 야당이든 문제가 있으면 정치적 고려 없이 법과 증거에 따라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게 중요하다”며 “그 과정에서 검사들이 피의자 인권을 짓밟거나 여론 재판을 부추겨선 안 된다”고 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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