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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부 (13)설법으로 일왕 울린 신라 심상스님 |신라 심상과 비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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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의 옛 수도였으며 한때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었던 곳, 우리의 선조 신라·백제인 들의 숨결과 얼이 지금도 피부로 느껴지는 곳이 나량다. 특급 전차를 타면 대판이나 경도에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나량는 경도에 이어 불교문학 유산이 가장 많이, 그리고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나량를 대표하는 불교문화재는 동대사 대불이다.
동대사의 신라 심상 대사 『화도 하신 후 최초로 설하신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중생들의 엄경 초강』은 일본 불교의 한국전래를 되새기게 하는 귀중한 전적이다.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성 근기를 염두에 두지 않고 깨치신 진리를 깨치신 그대로 설한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기는 하지만 그 진리가 깊고 오묘해서 중국에서는 화엄이 하나의 철학으로 크게 발달했고 우리 신라에서도 의상대사에 의해 화엄이 대성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화엄은 이곳 동대사를 중심으로 해서 신앙되고 연구 발전되었는데 그 원류는 신라 의상 계통이었으며 그것을 일본에 전한 분이 바로 심상 대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몇몇 학자들은 심상의 국적이 신라가 아닌 일본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저 중국에서 수학한 학승정도로 표시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호리이케」(굴지춘봉)교수였다.
필자는 이 「호리이케」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는데<동국대학교 (경주) 논문집 제5호 참조>이곳에서 갑자기 첫 대면을 하니 반갑기도 하고 서먹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었다.
현재 그는 대학을 정년 퇴직하고 이 도서관의 연구 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퇴근시간을 1시간씩이나 늦추면서 우리의 자문에 친절하게 응해주었다.
5시가 넘도록 조사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동대사 남문을 다시 들어서니 문자 그대로 어마어마하게 큰 대불전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여기서 우리는 이 대불전과 비로자나 대불상이 건립 주조되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동대사요록』과 의연이 쓴 『삼국불법전통연기』를 통해 그때의 소식을 알 수가 있다.

<국적을 일로 왜곡>
옛날 금종사에 양변이란 스님이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화엄경을 널리 펴서 중생을 크게 이익 되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밤낮으로 크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에 보라 빛 옷을 길게 걸친 스님이 나타나 『네가 화엄의 깊은 뜻을 널리 전하고자 하면 원흥사(일본 최초의 절 비조사의 이명) 에 있는 엄지화상을 찾아가서 청하라』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번쩍 꿈을 깬 양변화상은 단숨에 원흥사로 달려가 엄지화상을 만났으나 엄지는 『나는 이름은 엄지요만 진짜 엄지가 아니오. 대안사에 머무르고 있는 신라 심상 대덕이 진짜 엄지니 속히 가보시오』라고 했다.
여기 나오는 대안사는 현재 동대사에서 남쪽으로 약2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를 들고 찾아갔더니 주지스님은 출타중이고 부 주지 스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방문 목적을 듣고 난「가와노」(하야량문)부 주지스님은 1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의 『대안사사·사료』한 권을 기증해 주었다.
엄지화상의 말을 들은 양변은 한걸음에 대안사 심상 대덕에게 달려가 화엄경의 강설을 청했다 한다. 그러나 심상은 학덕이 부족함을 내세워 사양했고 다음날 다시 간청했으나 응하지 않자 양변은 성무 천황을 움직여 칙명으로 강설을 청하니 심상은 마지 못하는 듯 강의를 시작하게 된다. 이국에서 온 심상이 경거망동하지 않고 신중하게 강의에 임했던 저변의 뜻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성무 천황과 문무백관·장안의 명승대덕들이 운집한 가운데 역사적인 화엄경 초강이 시작됐던 것이다. 때는 천평 12년 서기 740년 10월8일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1천2백50여년 전의 일이다. 화엄 설법이 끝나자 와카쿠사 (고초산) 산 외에는 보라 빛 구름이 꽃같이 피어올라 그날의 법회를 축하했다한다.
성무 천황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비로자나 대불 조성의 발원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중국 운강석굴의 대불,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불상에 이어 동양의 3대 미술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이 대불의 조성 작업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이 일에 우리 나라에서 건너간 백제 스님들과 건축 기술자들이 동원된다.
일본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서기538년, 즉 백제 성명왕 때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불교가 전래되어 사원이 건립되고 불상이 만들어지던 과정과 특히 그때 활약했던 인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최초의 가람으로 알려진 아스카 (비조) 사는 법흥사라고도 하고 원흥사라고도 한다. 아스카사 란 이 절이 아스카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법흥사란 불법이 처음으로 일어난 절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흥사란 일본의 수도가 이곳 나량로 천도되면서 도시조영의 계획에 따라 많은 절들이 나량로 이전하게 되는데 그때 옮겨 지으면서 개명한 이름이다.

<숭불파가 주도권>
현재 나량시 중원통에 있는 원흥사에서 「스기무라」(삼촌) 주지스님으로부터 극락방의 설명을 듣고 떠나 비조사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방문목적을 듣고 난 「야마모토」(산본보순) 주지스님은 참으로 친절하게 비조사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주지스님의 설명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사적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서재로 갔던 주지스님이 한 5분 후에 한 권의 필사본 책을 가지고 왔다.『원흥사 연기』였다.「불본전래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은 약 56페이지쯤 되었다. 성수사본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간기를 보니 천평 19년 (747년) 2월11일 삼강삼인이 쓴 것이었다.
『원흥사 연기』에 의하면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흠명제 7년 서기 538년 10월이었다. 백제의 성명왕이 불상과 불경을 전해 준 데서 일본 불교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일본은 아직 국가형태나 사회 제도가 확립되지 못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씨족사회였다.
조상숭배나 씨족 신을 섬기던 때 불교라고 하는 색다른 이국의 종교가 들어오니 숭불의 찬반을 놓고 군신들은 크게 다툼을 시작한다. 숭불파의 대표가 「소가노·이나메」(소아도목) 였고 배불파의 중심인물은 「모노노베·노·코시」(물부옥여) 였다. 이 두 파는 정치적인 주도권 싸움에까지 연결되어 치열한 싸움을 하다 결국 왕명에 따라 소아씨가 불상을 모시고 신앙하게 되었다.
그후 소아의 아들 소아마자는 환속해 있던 고구려 승·혜변을 모셔다 스승으로 삼아 그의 딸을 출가, 득도시킨다. 그때 그녀의 나이 17세였다고 하니 소아 문중의 불심을 가위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법명은 선신니라 했는데 일본 최초의 비구니가 되는 셈이다. 그후 선신니의 제자로 풍녀와 석녀가 출가했고 법명을 선장니 혜선니라 했다. 이들 3인은 비구니가 되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출가, 승려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일 최초의 비구니>
선신니 등은 출가의 길은 계가 근본인데 여기엔 계사가 없어 정식으로 계를 받지 못했으니 백제에 가서 수계하고 3년만에 귀국했다고 되어있다.『원흥사 연기』에 나오는 위의 기록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본 불교는 소아씨 파의 주장에 의해 시작되고 소아마자의 딸이 출가했지만 결국 백제에 건너가서 수계를 하고 온다.
소아씨가 백제출신 인물이니 결국 일본 불교는 백제 인이 백제에 가서 수계하고 돌아와 승단을 형성하였으니 곧 백제 불교의 연장이며, 계맥의 원류가 백제 임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최초의 비구니 선신니가 득도한 후 서기 588년에 백제로부터 절을 짓는 전문기술자·불상 조성자·기와공, 그리고 불화를 그리는 화공이 일본에 왔다. 이것은 비조사와 사천옥사 등을 짓기 위한 준비작업 단계였다.
비조사가 착공 8년 만인 서기 596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절이 완공되자 혜자와 혜총이 머무르게되는데 고구려의 혜자는 595년에 일본에 와서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어 그의 교육을 담당했다. 성덕태자가 고구려 불교를 배웠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며 성덕태자가 지은 『법화의소』를 고구려에 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백제의 혜총도 일본에 불법을 널리 펴서 이 두사람은 「삼보의 동량」으로 추앙 받게 되었다.
605년에 백제계의 인물인「구라츠구리」(안작조)가 아스카사의 대불을 조성하니 드디어 일본 최초의 가람 최대의 사원인 비조사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현재 명일촌의 아스카사에는 이 대불의 일부가 아스카사 유일의 유물로서 현재도 남아 있다. <끝><이행구·동국대 교수 ·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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