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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수학] 이상의 오감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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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9면

천재 시인 이상(李箱)의 시는 실험 정신으로 가득하다.

이상의 작품에 대해 후대에 워낙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기 때문에, 만약 이상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 구구한 해석에 쓴웃음을 지을지도 모른다.

이상의 '오감도'네번째 시에는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시력검사판을 연상시키는 이 시는 0부터 9까지의 숫자를 기묘하게 배치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그런데 과연 이 시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진단 0:1

26. 10. 1931

以上 책임의사 이상

요즘은 진료기록을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하는 경우가 많지만 수기로 작성한, 그것도 대부분 휘갈겨 쓴 진료기록은 일반인에게 난수표 같이 느껴진다. 따라서 이 시는 난해한 진료기록을 패러디한 것일 수 있다. 또 이 시에 적힌 숫자는 거울에 비친 상처럼 거꾸로 적혀 있기 때문에 진료, 즉 거울을 통해 나타난 환자의 상태를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를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다. 가장 윗줄에는 1234567890, 그 다음 줄에는 123456789.0이 거꾸로 적혀 있다. 어떤 줄에 있는 수에 0.1을 곱하면 그 다음 줄의 수가 된다.

따라서 이 시에 배열된 수들은 동일한 비를 이루는데, 수학 용어로는 '등비수열'이라고 한다. 또 시의 형태에서 대칭의 미를 찾아볼 수 있다. 11줄로 시를 구성한 것은 대각선에 소수점을 배치하여 서로 대칭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보인다.

시의 마지막에 있는 '진단 0:1'이라는 문구에도 수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a:b의 비를 분수로 나타내면 a/b가 된다. 그렇다면 0:1은 0/1, 즉 0이다.

또 위의 시는 0.1을 11번 곱한 것에서 그치고 있지만, 계속 0.1을 곱해간다면 0에 가까운 수가 될 것이다. 0은 무엇인가가 소멸되는 상태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죽음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박경미 홍익대 교수 수학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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