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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 주면 후한 것" 470조 예산 심사하는 한국 국회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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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도 정부 예산안 법정 심사 마지막 날인 지난달 30일 오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소위에서 안상수 위원장(가운데)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내년도 정부 예산안 법정 심사 마지막 날인 지난달 30일 오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소위에서 안상수 위원장(가운데)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시간 줄이는 게 쉽진 않지만,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해보죠. 4분 넘으면 후하게 한 것이고 간단한 건 2~3분 안에 끝냅시다.”

지난달 30일 오후 2시 30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안상수 위원장은 이런 인사말로 예산안 등 조정소위를 시작하면서 테이블에 스톱워치를 올렸다. 시간을 잘 지켜 심사 시간을 최대한 줄이자는 의미였다.

이날은 예산안 심사의 법정 시한이었다. 자정까지 약 10시간 남았는데 17개 기관의 예산 심사가 남아 있었다. 수백억 원짜리 사업을 예결위원들은 최대 4분 만에 심사했다. 특허청ㆍ경찰청ㆍ기상청 등 쟁점이 많지 않은 기관 예산은 10분 이내로 심사가 끝났다. 수십억 원의 예산이 몇 분 만에 깎여 나가기도 했다.

이처럼 물리적인 상황만으로도 국회 예산 심사는 매년 ‘날림’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한 초선 의원은 “이렇게 대충 하는지 국회 들어와서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의원들이 게을러서라기보다는 국회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7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예산안 통과와 관련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7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예산안 통과와 관련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로 법에 보장된 시간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게 다반사다. 국회 예산 심사 기간은 1948년 헌법이 제정될 당시엔 120일이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부 때인 1962년 90일로, 1972년 60일로 줄었다. 박정희 정권 때 행정부가 짠 예산에 대한 국회의 심사 권한을 줄인 결과였다. 너무 기간이 짧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2016년 다시 90일로 늘어났다.

그러나 90일이라는 기간은 숫자일 뿐이다. 정부는 지난 9월 3일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해 이론적으로는 90일을 확보했지만, 예결위 첫 회의는 지난달 5일에 열렸다. 9~10월에는 국정감사, 교섭단체 대표연설, 대정부 질문 등이 열려 현실적으로 예결위가 불가능했다. 예결위 활동 시한이 11월 30일까지니 사실상 약 한 달만이 예산 심사에 주어진 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의 평균 예산 심사 기간이 85일이다. 미국은 240일, 영국은 120일이다. 각 나라 예산 심사의 충실도를 비교하기는 쉽지 않지만, 한국이 가장 ‘열악한 수준’이라는 데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한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6일 오후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합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6일 오후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합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예결위가 시작돼도 실제 정부 예산안의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는 기간은 더 짧다. 국회 상임위원회별 심사는 보통 2~3일 열린다. 예결위 예산조정 소위는 올해의 경우 8일 열렸다. 열흘 남짓 동안 470조원의 예산을 심사한 것이다.

예산 심사 기간이 너무 짧다는 데는 국회의원들도 어려움을 호소한다.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는 11일 “지난 6일 자정쯤 예산안 일독(一讀)이 끝났다”고 했다. 예산안 처리 시한을 나흘 넘겨서 겨우 예산안을 한번 훑어볼 수 있었다는 얘기다. 홍 원내대표는 “지역 예산을 예산안에 끼워 넣기 할 시간도 부족했다”고 하소연했다. 익명을 원한 한 예결위 관계자는 “예산안 한번 쭉 읽어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부처별 중복 예산 조정할 시간이 없다”며 “한국만큼 중복 예산 많은 나라가 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 전문가들은 예산 심사 시간 부족 문제를 예결위의 ‘상임위화’로 해소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박정희 정권 때 도입된 현재의 특위 체제는 특정 기간에만 열린다. 상임위는 1년 내내 상시로 열 수 있다. 영국·캐나다처럼 예산안 편성 단계부터 의회와 행정부가 머리를 맞대는 ‘예산안 사전 심의 제도’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예결위가 특위이다 보니 심사 기간이 부족할 뿐 아니라 위원들도 다른 상임위를 겸해서 예산 심사 전문성을 쌓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회법 개정으로 가능한 일인데 국회 의지가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안상수 예결위원장은 “예결위의 상임위 전환은 정부가 반대해서 진행이 안 됐다. 상임위화를 검토해 보고 있다”고 말했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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