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환자 식판에 남은 음식 모아 끼니 때우던 그 할아버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1)

희망과 절망은 한 몸이고, 동전의 양면이다. 누구는 절망의 조건이 많아도 끝까지 희망을 바라보고, 누구는 희망의 조건이 많아도 절망에 빠져 세상을 산다. 그대 마음은 지금 어느 쪽을 향해 있는가? 우리는 매 순간 무의식 속에 희망과 절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은 눈금 하나 차이지만, 뒤따라오는 삶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희망도 습관이다. 절망을 극복하게 만드는 희망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대 원동력이다. 그동안 길 위에서 본 무수한 절망과 희망을 들려드린다. <편집자>

시간이 꽤 흐른 어느 날의 기억 하나를 끄집어 내본다. 안성 살 때 일이다. 그때 나는 화물차에 방송 틀고 마을마다 과일을 팔러 다녔다. 산속 마을에서 정신없이 과일을 파는데, 불쑥 전화가 걸려왔다.

산속 마을에서 정신없이 과일을 팔고 있는데 아버지가 응급실에 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급히 병원에 도착하니 복도에 작고 초라한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 pixabay]

산속 마을에서 정신없이 과일을 팔고 있는데 아버지가 응급실에 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급히 병원에 도착하니 복도에 작고 초라한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 pixabay]

“명희야, 아버지 또 응급실 실려 왔다. 빨리 좀 와.”
가늘게 떨리는 엄마 목소리였다. 신선한 과일을 한차 실었는데, 참 난감했다. 더구나 그날은 추석 연휴 앞두고 물건을 제법 많이 사서 집안에 반은 덜어두고 나온 상태였다. 내 마음은 점점 시들어가는 과일에 머물러 있었지만, 몸은 이미 아버지가 실려 가신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급히 시동을 걸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하니 병원 복도에 작고 초라한 엄마 모습이 보였다.

“느 아부지 또 입원해야 한다는구나.”
나는 의사와 잠시 면담하고 입원 수속을 밟았다.

저녁 시간이었다. 환자들에게 나눠주는 식판 때문에 복도는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엄마를 안심시키고 나도 그제야 한숨 돌리며 대기실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때 우리 옆으로 노인이 슬리퍼를 끌고 천천히 와서 앉았다.

노인은 한쪽 발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그 발을 심하게 절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추레한 모습이다. 잠바를 걸친 것으로 보아 입원한 환자는 아니었다. 노인은 다 찌그러진 노란 양은냄비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몇 종류의 음식이 조금 담겨있었다.

걸인의 동냥 냄비에 놓여져 있는 돈들. 병원에서 만난 노인은 찌그러진 양은냄비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몇 종류의 음식이 조금씩 담겨있었다. [중앙포토]

걸인의 동냥 냄비에 놓여져 있는 돈들. 병원에서 만난 노인은 찌그러진 양은냄비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몇 종류의 음식이 조금씩 담겨있었다. [중앙포토]

“영감님은 누가 아파서 오셨어요?”
초면인 엄마가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픔이라는 공통점들이 있어서 그런지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유독 쉽게 말을 섞거나 친해진다.

그날 노인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인의 사연은 이러했다. 부도와 사기로 아들이 농약을 마시고, 그 충격으로 팔순 아내가 뒤따라 농약을 마셨다. 지금 중환자실에는 노인의 아들과 늙은 아내가 나란히 식물인간으로 누워 저승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할망구와 생떼 같은 아들이 저러고 있으니, 나는 죽을 자유도 없습니다.”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쪼그려 앉았다. 그는 시래기를 삶다 화상을 입었다며 우리에게 발을 보여주었다. 한쪽 발이 심하게 곪아 고통스러워 보였다. 상처가 깊은데 왜 치료를 안 받으시냐고 내가 물었다. 노인은, 아들과 아내 병원비도 많이 밀렸고, 그럴 여윳돈이 없다고 했다.

“영감님, 그 냄비는 뭐예요?”
엄마가 망설이다 노인에게 물었다.

“이거요? 내가 먹으려고, 저기 식판에 남은 것들을 내가 먹으려고… 모아요.”
노인은 입원한 환자들이 먹다 남긴 식판에서 환자들이 남긴 음식들을 그 냄비에 거두어 끼니를 때운다고 했다. 너무 충격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벌써 5년째 복도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노인은 병원 복도에서 5년째 입원한 환자들이 먹다 남긴 식판에서 음식을 냄비에 거두어 끼니를 때운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그 노인을 모시고 나가 순댓국을 한 그릇 사드리고 내 차에서 과일을 좀 챙겨드렸다. [사진 pixabay]

노인은 병원 복도에서 5년째 입원한 환자들이 먹다 남긴 식판에서 음식을 냄비에 거두어 끼니를 때운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그 노인을 모시고 나가 순댓국을 한 그릇 사드리고 내 차에서 과일을 좀 챙겨드렸다. [사진 pixabay]

나는 엄마와 함께 그 노인을 모시고 나가 순댓국을 한 그릇 사드리고, 내 차에서 과일을 좀 챙겨드렸다. 노인과 나는 보호자 대기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새벽에 잠시 복도로 나가보니 노인의 가슴엔 아직도 태울 것이 남았는지 주차장 끝에서 연신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뒷모습이 쓸쓸한 노인을 바라보다 길게 심호흡을 하며 돌아서는데, 흰 천에 덮인 한 육신이 지상의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나가고 있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위안이었고 버팀목이었을 몸 하나가 이승을 하직하는 순간이었다. 중환자실 병상 하나는 떠나간 흔적을 휴지통에 버리고 새로운 환자를 받을 준비로 분주했다. 누군가의 어제가 세상을 뜨고, 누군가의 오늘이 또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어느새 올해도 겨울 한복판에 와 있다. 달력 한장이 넘어갈 때마다 추위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요즘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 만났던 그 노인의 슬픈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어두운 밤, 창백한 병원 간판 아래 홀로 앉아 담배를 태우던 노인의 뒷모습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중환자실에 있던 노인의 아들과 아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 노인은 아직 살아계실까? 이 세상에 계시든 하늘로 떠나셨든, 더는 아프고 힘겹지 않은 곳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김명희 시인·소설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