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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11.미국 수련의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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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퀸즈 종합병원 수련의 시절 동료 의사들과 함께(왼쪽에서 둘째가 필자).

5년에 가까운 미국 생활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나는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에서 1년의 인턴 과정을 마쳤고, 인근 퀸즈 종합병원으로 옮겨 레지던트를 밟았다.

미국 종합병원은 첨단 의료시설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감동시킨 것은 체계적인 의료시스템과 의료진의 환자에 대한 열정이었다. 인턴의 일과는 오전 5시에 시작돼 세상이 적막 속으로 빠져드는 한밤이 돼서야 끝났다. 소아과 인턴을 돌던 첫날의 일이다.

병동에 도착한 내게 수간호사가 환자들의 병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30명이 넘는 환자의 병세와 검사.치료 결과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녀는 무려 한 시간여에 걸쳐, 그것도 차트 한번 뒤지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마치 한 권의 책을 달달 외우는 듯했다. 입원 환자 한 명 한 명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머릿속에 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이런 과정을 나도 반복해야 했다. 한 시간쯤 뒤에 온 수석 전공의(칩 레지던트)에게 수간호사로부터 들은 내용을 그대로 설명했다. 단어 하나도 틀려서는 안 됐다.

수석 전공의의 보고가 끝나면 과장(Attending Doctor)이 치료를 위한 처방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도 놀랍지만 어떻게 매일 그 많은 환자의 기록을 외울 수 있었는지.

그러나 이것은 환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바탕을 둔 일상적인 훈련 결과다. 당시 미국 병원 수련의에겐 출퇴근이 없었다. 환자를 돌보느라 밤새는 것은 예사였다. 수련의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환자가 아플 때만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환자와 같이 생활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환자의 작은 변화까지 살펴 머릿속에 모든 환자의 정보를 차곡차곡 입력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 병원은 정교하게 짜여진 매뉴얼로 운영됐다. 완벽한 환자 관리 체크리스트는 수련의에게 엄청난 업무 강도를 요구했다. 하루하루 진땀 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격일로 당직을 섰고, 정상근무일조차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강행군을 계속했다. 나는 잠을 포기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환자들과 붙어살다시피 했다.

소아과 인턴 시절 나는 '주사 잘 놓는 의사'로 통했다. 신생아의 이마에 놓는 나비 모양의 주사인 '나비침'도 한 번에 척척 혈관을 찾아내 동료.과장들을 놀라게 했다. "동양인은 손재주가 뛰어나다"라는 말을 들으며 우쭐하기도 했다.

그 덕에 어려운 주사를 놓을 때나 미국 의료진이 몇 번 실패한 뒤에는 어김없이 나를 찾았다. 당직이 아닌 날에도 '주사를 놔 달라'는 요청에 불려다닐 정도였다. 남자아기에게 의무적으로 해주는 포경수술을 5분여 만에 끝내 15~20분 걸리는 미국 의료진에게서 "솜씨 좋다"는 칭찬도 들었다.

태어난 지 2~3일 지난 신생아에게 기본적으로 행해지던 '대사이상 검사'도 내 몫이었다. 신생아의 대퇴동맥(사타구니 부근)에서 채혈을 해야 하는데 손이 큰 미국 의사들에겐 어려운 일인 것 같았다.

언어와 환경이 낯설고, 일과는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선진 의술을 맘껏 공부할 수 있다는 데 만족하며 나는 빠르게 미국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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